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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치 Jun 07.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기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 사진. 왼쪽은 영화 첫 장면이기도 하다.

다양성 영화가 눈에 띌 만한 성적을 거두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고서야. 그런 토대에서 개봉 3일 만에 관객 수 3만 명을 넘긴 영화가 있다. 건조하고 실험적인 영화가 이런 추세를 보이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데, 평론가들의 극찬과 인상적인 예고편 등이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이달 5일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모순적으로 영화 첫 장면은 암흑이다. 제목이 나오고 정말 느린 속도로 페이드 아웃되며, 극장은 기괴한 음악으로 가득해지다가 뒤편에서 또 다른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관객 앞에 놓인 스크린 쪽에서는 미리 깔린 소리와 다르게 평화로운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강가에서 한적하게 놀고 있는 루돌프 회스와 그 가족들이 페이드 인으로 드러난다.


루돌프 회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수용소 바로 옆의 관사에 머물고 있다. 관사는 농작물과 꽃, 수영장과 온실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수용소와 관사는 담장과 대문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담장을 올려도 보이는 수용소의 모습은 포도덩굴이 최대한 가려놓는다.


영화 전체 내용과 구조를 관계지어 생각하면, 이 첫 장면은 관객의 위치를 못 박아 둔다. 이들 가족의 집과 삶은 회스가 소장으로 일하면서 얻은 혜택이다. 유대인들의 소지품을 가져와 쓰며 덕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어떻게 쓰이고 버려지는지는 담장과 포도덩굴로서 막아놓고 외면한다.


첫 장면에서 가족은 산과 물 저편을 바라본다. 마치 관객 뒤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관객은 이들 가족을 본다.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스크린 보기를 강제당한다. 하지만 귀는 자유롭다. 보면서도 보는 것에 온전히 구속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영화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모순, 즉 보여주는 것과 담아내려고 하는 것의 모순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런 방식은 영화 전체의 형식이기도 하다. 


또한, 첫 장면에서 나타나는 시각과 청각의 모순은 스크린-관객-객석 뒤 구조로 표현된다. 영화관은 더욱 확장되었고, 스크린-관객 구조는 더 이상 입체적이지 않다. 동시에 관객은 앞을 보면서도 관객 뒤의 존재들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가족의 일상을 보면서 순간마다 그 아래 토대를 느낀다는 건 하나의 끔찍한 고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수용소 안의 참상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수용소 안의 소리가 직접적으로 담기는 건 한 장면뿐이고, 총소리와 비명 등은 작은 소음처럼 여겨진다. 마치 우리 삶의 터전 근처에서 잠깐 이뤄지는 공사 소리나 선거 유세 소리처럼. 탄압받는 자들의 흔적은 그 소리로만 알 수 있다. 가족의 삶은 유다르지 않고 안락하다.


영화 '사울의 아들' 포스터(왼쪽), 영화 '액트 오브 킬링' 포스터(오른쪽)

인간성에 관한 내부의 영화 ‘사울의 아들’, 악의 평범성에 관한 외부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액트 오브 킬링’, ‘사울의 아들’이 연상되는 영화다. 특히 사울의 아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사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노역하고 있는 헝가리 사람이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시체를 옮기고 가스실을 청소하는 유대인 포로, 존더코만도다. 매일 같이 유대인들을 가스실 안에 들어가도록 유도하고 ‘토막’을 치우고 피와 오물을 닦는 등 노역을 치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가스가 살포된 뒤에도 숨을 헐떡이며 살아 있는 소년이 발견된다. 그의 입과 코는 의사로부터 가로막힌다. 사울은 그가 자기의 아들이라며 시신을 챙기고, 유대교 교리에 따라 장례 의식을 주관하는 랍비를 찾아 나선다. 회스 가족의 일상에서 지워진 유대인들의 삶과 흔적이 사울의 행적으로 증명되는 셈이다. 회스는 헝가리인 수십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절멸하도록 계획을 준비하는데, 이런 지점에서도 ‘사울의 아들’은 끊임없이 호명된다.
 

아우슈비츠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에 관한 윤리성에 기초하면, 어떤 답과 실천이든 틀렸다고도 할 수 있다. 두 영화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준다는 역설적 특징을 갖고 있지만 구체적인 표현 방식은 다르다. ‘사울의 아들’의 카메라는 사울의 등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를 쫓아간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신과 불타는 사람, 독일인 등은 초점에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인다. 분명 보여주고 있지만 보여주지 않고, 그의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만 알려준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유대인의 흔적을 거의 배제한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회스 가족들의 행위와 그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면서도 막을 나누듯 원색과 음향 효과를 통해 관객이 이들에게 몰입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도록 한다. ‘사울의 아들’에서 펼쳐진 지옥도와 양상은 다르더라도 유사한 깊이를 갖는다.

사울과 회스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한 소녀를 거쳐 대비를 이룬다. 그는 회스가 자기 딸에게 헨젤과 그레텔의 한 대목을 읽어주면서 밤의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시각화된다. 사과를 모아 유대인 노역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땅에 꽂아놓는다. 영화 제목은 수용소가 세워진 아우슈비츠와 인근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다. 소녀 역시 영화의 주인공이며, 그가 나올 때마다 적외선으로 표현되는 집 바깥은 회스 가족 주위의 색과 빛에 대비된다. 다채로운 세계보다도 적외선의 세계가 진정 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인간성과 핍박받은 자들이 지닌 삶의 의지가 표현된 인물인데, 이는 그토록 랍비를 찾아 나선 사울의 모습과도 겹친다. 이런 행동들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계속 묘사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가 회스의 일상에 녹아들지 않도록 경고하는 원색과 음향 효과처럼.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 사진.

학살의 무한반복을 추구하고 그 이미지는 가리는 데서 무한히 증식되는 생존과 자기파괴의 기제

  

회스는 수용소를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는 무한반복 기계가 되도록 계획한다. 상부에 의해 전담 지역이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지역으로 바뀌어 가족을 관사에 두고 전출 가기도 하지만, 과거의 공로를 인정받으며 다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으로 부임한다.


복귀를 앞두고 독일 군인과 그 지인들이 모인 파티 자리. 회스는 맨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가스로 그들을 죽일 수 있을지 설계자로서 고민한다. 그 뒤 계단을 내려가고 구역질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마치 그가 설계하고자 했던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는 수용소 내 무한 반복되는 학살 행위처럼.

암흑 너머 작은 빛이 보이고 문이 열린다. 현대 시점의 수용소다. 희생자들의 흔적과 수용소를 청소하는 인부들의 모습이 이어지고, 이 장면을 본 회스는 다시 암흑이 깔린 계단으로 내려가고 어두워진 영화관은 기괴한 소리와 비명으로 가득 찬다.
 

이 시퀀스는 여러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가 미래를 예측한 것일 수도 있고 과거와 현재가 영화적으로 맞닿은 것일 수도 있다. 그는 현대의 모습을 봤다고 추측된다. 암흑을 향해 내려가면서는 구역질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현대의 모습을 본 뒤 어떤 이유로 안심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대 시점 수용소의 청소 인부들은 회스 집에서 일하던 인부들과 겹치고, 현대의 수용소는 공간은 회스가 발을 딛고 있는 공간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의 집은 가스실과 같은 공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자기 집에서 불을 끄고 문을 잠그는 것은 그래야만 살 수 있다는 생존의 의미이며, 동시에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암흑을 향해 내려가는 것,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막는다는 그동안의 굴레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 암흑 속에 묻히고 영화는 암전되어 끝난다. 그가 걷는 계단과 암흑에는 끝이 있을까. 만들어낸 지옥도를 가리고, 그 옆에 자기만의 구획을 만들어 사는 삶에 한 줄기 빛은 존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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