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핑계 삼어 떠난 유럽여행_로스 아르코스
새벽에 누가 창문을 열었는지 숙소 안에는 찬 기운이 돌아 잠을 좀 설쳤다. 오전 6시 어김없이 알람 진동을 느꼈지만 오늘은 아침 7시까지 몸을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몸이 살짝 으슬으슬했지만 오늘도 나는 길을 걸어야 했다.
나갈 준비를 하던 중 SY형님께서 오늘 도착지인 로스 아르코스 공립알베르게가 문을 열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부엔카미노 어플을 열어 다른 공립알베르게에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비수기의 순례길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 생각으로 오늘도 동행분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나저나 11월이 되니 아침에 열려있는 바(Bar)를 찾아보기 힘들다. 따뜻한 라떼와 함께 목을 조금 녹이고 출발하면 딱 좋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30분을 더 걸으니 조그마한 슈퍼마켓이 다행히 열려있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주인아주머니께서 바로 커피를 원하냐며 친절하게 커피를 뽑아주셨다.
커피 한잔을 하고 나오니 반려동물과 함께 순례길을 걷고 계시는 독일출신의 노부부분들과 마주쳤다. 용서의 언덕에서 뵙고 이렇게 마주치니 어찌나 반갑던지. 멋진 수염을 가지신 할아버님과 미소가 너무 아름다우신 할머니. 지금도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반가운 미소로 안부를 여쭤봐주셨던 그 순간들이 생각날 때가 있다.
두 분께서는 반려견과 함께 걷다 보니 공립알베르게에서는 숙박을 할 수 없고, 반려견과 함께 잘 수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서 머무르고 계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반려견도 함께 걸으면 인증서가 나온다고 하니 너무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로스 아르코스로 가는 길에는 순례길에서 필수적으로 들려야 하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이라체 수도원의 와인저장고이다. 식수대와 함께 무료로 와인을 받아먹을 수 있는 곳. 수도꼭지를 열어보니 와인이 콸콸 잘 나온다. 독하지 않고 포도향이 물씬 느껴지는 맛인데 내 입맛에도 딱 맞아 나는 물통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와인 저장고 벽에는 '이 와인이 당신의 길에 행복이 되어 줄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는데 말 그대로 물통에 가득 담긴 와인은 남은 거리 나의 행복이 되어주었다.
내 눈앞에는 드넓은 밀밭과 포도밭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있다. 오늘부터 언덕보다 드넓은 평야지대가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미 수확을 마친 밀밭과 포도밭 사이로 자리 잡은 올리브 나무들이 눈에 띈다.
지금의 모습도 충분히 나의 마음에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수기 시즌에 와서 풍성한 밀밭과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습도 봤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또 순례길을 와야 하는 이유가 생겨버린 것 같다.
이 정도쯤 걸었으면 나타나고 남았을 마을의 모습 대신 저 멀리 푸드트럭 한 개가 보였다.
걸으면서 중간중간 간식을 챙겨 먹은 탓이라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환타나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푸드트럭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시켰다.
푸드트럭 주인분께서는 자신의 부인이 끓인 수프라며 정말 맛있다며 권해주었다. 냄새에 이미 넘어간 나는 나도 모르게 수프를 시켜 한 입 먹었다. 아침부터 으슬으슬한 기운이 느껴졌던 나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맛이었다. 맛은 딱 감자탕 맛이었는데 모습은 시래깃국과 비슷했다. 인생 수프라고 생각이 들만큼 나는 정말 맛있었다. 같이 계셨던 순례자분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까먹고 수프를 들이켰다.
이제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 휴대폰을 켜 숙소를 한번 더 찾기 시작했다. 지금 열려있는 사립 알베르게가 있긴 하지만 이곳의 구글 리뷰가 상당히 좋지않았다. 혹시나 해서 다음 마을인 산솔 공립알베르게에도 전화해 봤지만 오늘은 열지 않는다는 답만 되돌아왔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열려있는 알베르게를 향해 움직였다.
괜히 기분 탓이었을까 걱정 속에 도착한 로스 아르코스는 무언가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그저께 잠시 마주쳤던 새로운 한국분과도 인사를 나누었는데 역시나 구글 리뷰가 좋지 않아 비싸더라도 근처에 있는 호텔로 숙소를 잡았다고 하셨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편이기도 하고 일단 한번 가보자는 마음으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주인분은 나를 보자마자 한국사람이라며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딱 시골에 있는 펜션 분위기였다. 너무 기대를 하지 않은 탓일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하고 침실과 부엌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당장 환불받고 나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고 운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침실 안 창고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겨졌고, 부엌에 수세미는 언제 교체했는지 모를 정도로 더러웠으며 식탁도 마찬가지였다. 참아왔던 라면을 끓어먹으려고 했던 생각을 접기로 했다. 역시나 리뷰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가격도 15유로면 알베르게에서 비싼 편에 속하는데....
'그래. 이것 또한 순례길이다'라는 생각으로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나는 뒤에 따라오고 있을 동행분들에게 이쪽으로 오면 안 된다는 카카오톡을 보냈다.
그래도 저녁을 해결해야 했기에 간단히 먹을 음식을 사러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전자레인지용 볶음밥과 스페인 라면을 하나 사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오늘 끓여 먹지 못한 신라면은 내일 무조건 끓여 먹을 것이다. 소소한 다짐을 하고 순식간에 저녁을 해결한 뒤 나는 빠르게 잠을 청했다.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