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핑계 삼아 떠난 유럽여행_수비리
아직 알베르게에 적응하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어제 피레네 산맥의 후유증일까 계속 새벽에 잠을 설치다가 오전 6시에 일어나 출발할 준비를 했다. 짐을 정리하고 로비로 내려갔는데 어떤 한국인 여성 두 분이 알베르게 직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서 들어보니 동키서비스를 신청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계시길래 혹시 도움이 필요한지 여쭈어본 다음 도와드렸다.
동키서비스는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내가 도착하는 마을까지 짐을 보내주는 택배서비스이다.
그렇게 동키서비스 신청을 도와드리면서 어제 생각보다 어깨에 무리가 있던 터라 나도 오늘 동키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가격도 8유로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걷는 동안 딱 두 번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자'는 마음으로 왔는데 그 중 한 번을 오늘로 선택했다. 배낭은 보관소에 넣어두고 걷는 동안 필요한 물건만 크로스백에 넣은 뒤 아침을 먹으러 갔다.
아침식사를 하러 가니 생장부터 같이 걸어온 한국인 여자분이 먼저 식사를 하고 계셨다. 어제 저녁에 만난 아르헨티나 남자분이랑 오늘 같이 걷기로 했다며 나에게도 같이 걷자고 제안해 주셔서 그렇게 3명이서 같이 길을 걷기로 했다.
이름이 루시오인 아르헨티나 친구는 굉장히 밝고 적극적인 친구였다.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할 수 있어서 국적 상관없이 모든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친구로 만들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스페인어에 대한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또 루시오는 산티아고 순례길만 3번째이며, 작년에는 자전거를 타고 유럽횡단을 돌았다고 한다. 심지어 배낭에는 텐트를 들고 다니면서 텐트에서 잠을 잔다는 말에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루시오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쉬운 단어로 친절하게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주었고, 우리도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루시오 말에 가장 쉬운 '감사합니다' '고마워요'부터 한국어를 알려 주었다.
그렇게 루시오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숲길을 걸어 나갔다.
숲길을 조금 더 걷다 보니 오늘 아침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국인 여성 두 분과 만났다.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같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잔잔한 숲길을 끝나고 작은 마을이 나오자 어제 숙소에서 만난 많은 외국인 분들이 바(Bar)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쉬어가자며 바에 들어가 음료 한잔씩 시켰다. 나는 생맥주를 시켰다.
앞으로 길을 걷다가 바에 들어와 와인, 맥주, 커피 한잔 먹는 게 일상이 될 것이다.
바에서 한국인 남자 두 분도 같이 합류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출발했다. 이때부터 루시오와 함께 자연스럽게 5명(한국인 4명+루시오)에서 한 팀처럼 함께 길을 걸었던 것 같다.
이 날은 루시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루시오는 아르헨티나에 있던 집, 차 등 모든 걸 팔고 프랑스에 있는 섬으로 가족들과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직접 집도 짓고, 마당에서 농사지으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정말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본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루시오와 함께 걸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짧은 시간에도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같이 걷는 사람이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 한국사람들이라 언어적으로 많이 불편할 수도 있고, 발걸음도 맞지 않았을 텐데 기다려주고 같이 쉬어주고, 누가 부탁한 적 없는데도 한 명 한 명 말 걸어주면서 스페인어를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노력해 주는 모습에 정말 감사함을 느꼈다. 사실 나조차도 발걸음이 맞지 않아 먼저 가보겠다고 말을 할까 고민했었기 때문이다.
계속 길을 걷다가 이틀뒤 도착하는 팜플로나는 대도시라서 한식재료를 구할 수 있으니 큰 숙소를 빌려 다 같이 요리를 해서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추억을 쌓는 것 같아 흔쾌히 허락했다. 루시오한테도 함께하자고 말하니 매운 걸 못 먹는다며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고 한다.
중간에는 푸드트럭에 잠시 들려 환타를 사 먹고 순례자 여권에 쎄요(Sello_도장)도 찍고 즐겁게 길을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는 알베르게, 숙소, 바와 같은 곳은 순례자 여권에 찍을 수 있는 쎄요(도장)를 찍을 수 있다. 도장을 기준에 맞게 모으면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에서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샌가 주비리에 도착했다. 사실 주비리에서 자고 싶은 알베르게가 있었지만 지금은 뭔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도 다른 분들과 같이 공립 알베르게에서 자기로 했다. 루시오는 역시나 알베르게 주인과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알베르게 옆에 공터에 허락받고 텐트를 폈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지 한편으로는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
스페인은 시에스타(siesta) 시간이라고 낮잠 자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에는 대부분 식당과 가게가 문을 닫는다. 우리가 도착한 오후 3시는 한창 시에스타 시간이기 때문에 배고프더라도 조금 더 참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갈 수 있다.
숙소에서 빨래도 돌리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가 시간이 되어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다. 오늘의 메뉴델리아는 샐러드, 송아지고기, 푸딩으로 시켰다. 그러다가 갑자기 MBTI 이야기가 나와서 루시오에게 한국에서 유명한 테스트라며 MBTI 테스트를 알려주었다. 결과는 역시나 ENFP... 한눈에 인싸인지 알아봤다.
루시오에게 ENFP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자 마음에 들었나 보다. 자신이 한국에 가면 인기가 많을 거라며 옆 테이블에 있었던 다른 외국인들한테 내가 ENFP라면서 한국 가면 인기 많을 거라며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쩌나 웃기던지 오늘도 사소한 거에 많이 웃는 날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 내일 갈 숙소를 예약하고 다들 피레네 산맥을 넘은 소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중 한 분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 같이 걷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고 조금 더 가보려 한다는 말을 했다. 사실 피레네 산맥을 지나고 인상 깊었던 장소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오히려 한국에 있는 산 길이랑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나는 워낙 주변에 관심이 많고 새로운 환경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걷는 내내 새로웠지만 우리나라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만족을 못 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소등시간까지 수다를 떨다가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