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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토 Nov 04. 2021

황새여울 된또까리

뗏목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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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옥(全山玉)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요릿집도 요정도 아닙니다. 동강 물줄기가 구불구불 부딪치고 구르다가 한숨을 돌리는 곳이 있습니다. 만지입니다. 전산옥은 동강 기슭 만지에 들어선 주막의 주인 여자입니다. 과거 떼꾼들은 강원도 산간에서 베어 낸 통나무를 서울로 운반할 때 동강을 이용했습니다. 도로와 장비가 여의치 않을 때 동강은 낙차와 중력과 인력을 이용하는 천연 컨베이어 벨트였죠. 하지만 위험했습니다. 동강 곳곳에 여울이 형성되어 있는데 뗏목은 여울 바닥에 걸리거나 암초에 부딪치기 일쑤였습니다. 뗏목이 여울 바닥에 걸리면 떼꾼이 물속으로 들어가 밀고 당기거나 심할 경우 뗏목 일부를 풀어 다시 묶어야 했습니다. 암초에 걸려 뗏목이 뒤집히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정선 아우라지를 지나고 평창 회문리와 영월 문산리를 이겨낸 뗏목은 만지에 이르러 한숨 돌립니다. 칡 줄기와 느릅나무 껍질로 엮은 뗏목도 헐거워졌습니다. 물이 얌전하고 잔잔한 곳에서 뗏목을 단단하게 다시 묶어야 합니다. 떼꾼들의 허기도 달래야 하고요. 이런 곳에 주막이 없을 리 없겠지요. 전산옥 선생(1909-1987)은 떼꾼들 사이에서 즐거운 친구였습니다. 피부가 곱고 미모가 뛰어난데다가 정선아리랑을 기가 막히게 불러 서울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전산옥 선생은 술집 기생으로 참칭되어서는 안 될 예인이었습니다. 동강에 기대어 사는 영월, 정선, 평창의 순박한 떼꾼들의 성정으로 미루었을 때 난잡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릴 때 제 아버지는 어라연 얘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그곳에 가면 은빛 모래가 널찍하게 펼쳐 있고 바위가 강물을 따라 흘러내린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이십대의 젊은 아버지는 당신 친구들과 그곳으로 놀러가 자주 소주를 드셨습니다. 낮에는 쏘가리나 꺽지, 갈겨니, 쉬리가 술안주였고 밤에는 하늘의 별을 따 잡수셨답니다. 어라연의 모래 위에서 군복바지 친구들과 어깨동무로 찍은 아버지의 흑백 사진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어쩌면 아버지도 떼꾼들과 섞여 전산옥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전산옥이 70년대까지 장사를 했고 아버지의 이십대는 60년대였으니까요. 동강 만지에 가면 전산옥의 주막 터를 소박한 안내문으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이름이 참 정겹고 구수합니다만 떼꾼들 사이에서는 죽음의 여울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정선에서 평창을 거쳐 문산리에 이를 동안 뗏목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동강은 본래 공격적이지 않으니까요. 바위 곳곳에 진달래가 박히고 뭉텅이로 피어난 산 벚꽃에 정신이 아득할 때쯤 뗏목은 된꼬까리에 이릅니다. 긴장감도 최고에 이릅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 어라연을 지나면 여지없이 된꼬까리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경험 많은 떼꾼은 여울 바닥 생김새를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걸리지 않도록 뗏목을 이끄는 것, 그게 떼꾼의 실력이었죠. 된꼬까리를 무사히 지나면 떼꾼들은 전산옥에서 당당하게 막걸리를 나누었을 겁니다. 방금 지난 된꼬까리에서의 흥분과 성취를 술잔처럼 높이면서 말입니다.  

 

  40년 동안 미루어 온 숙제. 이번 동강 여행은 삶의 숙제 하나를 해결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말로만 들었던 어라연의 은빛 모래와 흐르는 바위를 입증하고 싶었습니다. 쏘가리와, 꺽지, 갈겨니, 쉬리는 보지 못하더라도 밤하늘의 엄청난 별은 아니더라도 어라연이 그곳에 있기만 하면 아버지의 말씀을 인정할 참이었습니다. 젊을 때는 유랑을 핑계로, 경찰이 되어서는 민생과 섭생을 이유로 엄두내지 않았던 곳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에서 산(잣봉) 하나만 넘으면 어라연입니다만, 그곳을 찾아가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산을 넘어 다니셨고 저는 거운리에서 강을 따라 다녀왔습니다.


  영월읍 거운리에 가면 ‘니토 선생 생가 터’가 있다고 장난으로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1971년, 어라연에서 멀지 않은 거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집터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아스팔트가 깔렸더군요. 코로나가 아니면 래프팅 보트를 가득 실은 트럭과 승합차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길입니다. 제가 태어난 초가집은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니토 선생 생가 터는 농담으로만 존재하는,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아련한 곳입니다. 아버지에게 들은 어라연에 대한 동경을 확인하는 데만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면 니토 선생 생가 터는 이제 어디에 가서 목도해야 할까요. 이번 동강 여행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을 좇은 추억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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