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유진 Mar 18. 2024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김병운

"우리는 이 좁아터진 집에서만 연인이야 이 집을 나서면 너는 어김없이 우리를 지우고 감추지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이 책은 공상표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배우 강은성의 이야기이다.

배우 강은성과 감독 김우영 두 남자의 사랑, 김우영의 죽음, 강은성의 변화들을 다양한 시점과 인터뷰 형식, 시나리오 등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래서 강은성의 인생이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강은성과 김우영은 퀴어 영화 <작별의 계절>을 찍게 되는데, 공개만 앞둔 상황에서 강은성은 문득 본인의 성 정체성이 드러나는 게 무서워져서 그 영화의 공개를 두고 김우영에게 매달리고, 협박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영화 공개를 제지하면서 이 둘은 이별한다.


"이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망에 들끓어서 다음이 없는 것처럼 굴었는데, 당연히 다음은 있었고, 저는 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거죠. 사람들이 '진짜 나'를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급격히 자신이 없어졌어요. 이 영화에 출연해야 했던 거의 모든 이유가 이 영화가 공개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로 돌변한 거죠."

강은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순간들 앞에서 수없이 무너지는 걸 보고 강은성이 혼자 견뎌왔을 무수한 시간들을 상상했다. 남들과 다른 자신을 마주하고, 수많은 벽을 갈고닦아세우며 나를 부정하고 고쳐나갔을 시절들을 떠올렸다. 쉽게 바뀌지 않을, 아니 어쩌면 평생 노력해도 바뀔 수 없는 것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했을 그 수많은 노력들이 참 슬펐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 남들과는 다른 나를 안고 사는 건 너무도 고달픈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은성과 김우영이 헤어졌을 때, 김우영이 있던 이태원의 한 게이클럽에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김우영은 그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그 혐오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 사실 같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들을 향한 혐오를 그들 자신에게 투영하고, 결국은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로 나왔다는 게 참 씁쓸했다. 만약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세상이 아니었대도 그 방화범은 불을 질렀을까? 이들이 맘 편히 사랑하고 본인을 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남자가 아무리 우리와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여도, 아무리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더라도 

우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라고요.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지만. 

그 남자는 우리가 자신을 증오할 때마다 그 감정을 먹이 삼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런 고약한 괴물 같은 존재인 거라고요."

"우리가 우리를 숨기고 감춤으로써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똑똑히 봐 놓고도 또다시 침묵한다는 게 기막혔거든요."


"나를 죽이면서까지 내가 원치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저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진실해야 한다는 걸 알아요. 저 자신에게는 물론 제가 앞으로 연기할 인물들, 더 나아가 그걸 지켜볼 관객들에게도요."

이태원 방화 사건에 대한 성소수자들의 인터뷰집을 제작하는 이용진의 인터뷰에 강은성이 커밍아웃을 하고 참여하면서 강은성은 본인을 인정하고, 김우영과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무서워하던 강은성이 커밍아웃을 하고 인터뷰에 참여하는 걸 보면서, 김우영의 죽음과 그 이후의 무수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의 소설들은 심경의 변화에 포커스를 맞춰 전개한다면 이 소설은 강은성의 행동 변화들을 인터뷰로 제시해서, 강은성이 그 변화에 도달하기까지의 수많은 노력과 생각들을 더듬어가면서 읽어나가게 됐는데, 그렇게 읽어 나가다 보니까 그 감정들이 내게 전이된 것 같이 느껴져서 더 와닿았다.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특별한 날에 꽃 선물의 의미는

"네가 그동안 여기 도달하기까지 겪은 수많은 수고, 고통, 힘듦을 알고 있다"라는 말을 본 적 있는데

이 책을 읽는 내내 강은성에게 꽃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 감정들을 헤아리고 조금 더 단단해진 순간들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마지막에 강은성의 필모그래피에 <작별의 계절>과 그 이전에 김우영과 찍었던 다양한 필모가 추가되어 나열되는데 이 부분이 되게 뭉클했다. 어떤 대사 하나 없이 그저 나열되어 있는 필모그래피들의 이름을 읽었을 뿐인데도 강은성의 인생이 그려졌다. 숨겨져있던 강은성의 필모들이 공개된 것처럼 숨어있던 "진짜 강은성"도 세상의 빛을 보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수많은 강은성들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작가의 이전글 구의 증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