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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진 Jan 22. 2024

괴물

누가 괴물인가?

수많은 영화 속에는 늘 악역이 있고 그 악역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영화는 작동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악역, 즉 괴물은 없다  "누가 괴물인가?" 이 영화 속에서는 계속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을 따라 복마전을 찾아 헤매다 보면 어느 순간 근원적인 의문에 도달한다. 다른 영화들 속의 악역의 형태의 악인이 실제로 존재할까? 우리가 이따금 이분법적이지 않은 것들을 이분화하려고 할 때 많은 사소한 것들이 가려진다. 이 영화는 그 이분화에 가려진 사소한 것들에게 선사하는 영화다. 사실 모든 일은 파편적이고 연쇄적이다. 배후와 원흉이라는 단어는 한 사람으로 치환 불가한 채 그저 미지수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것들을 쉽게 치환하고 획일적인 답을 내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사소한 것들이 도외시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세상은 이 사소한 것들의 집합체이다. 큰 악행들로만 나쁜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며, 큰 선행으로만 좋은 세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작은 댓글은 사람을 죽이고, 어떤 작은 호의는 사람을 살린다. 이렇게 세상은 작은 악행들로도 쉽게 탁해지고, 작은 선행들로도 쉽게 정화된다. 그리고 이건 비단 세상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마트에서 뛰어다니던 아이를 넘어트렸던 교장 선생님이 미나토에게는 트롬본을 쥐여주며 일어설 수 있게 하고, 히나타를 지켜주던 미나토는 거짓말로 호리 선생을 공격한다. 인물들 중 그 누구도 완벽하게 악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완벽하게 선하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오염과 정화를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사람은 늘 변하고, 늘 변할 수 있다. 그 수동성과 능동성을 경시하는 순간 우리는 진짜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 자주 악해지지 않고, 더 자주 선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노력들이 모여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일궈낼 수 있기를. 진흙투성이의 히나타와 미나토에게 볕이 들듯이, 어떤 지저분한 악들에게도 선이 닿을 수 있기를. 그렇게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를. 이 영화와 함께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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