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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마우지 Oct 13. 2023

이사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20년간 이사를 가지 못한 이유

우리 집은 부산의 중심 서면에서 시작했다. 물론 나는 기억이 없다. 태어나고 약 3살까지 고모의 주택 1층에 세를 들어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처음 이사 갈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집이 낡은 것도 있지만 어머니에게 시누이는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고 한다. 지금의 서면은 부산의 중심 번화가 성장했다. 내가 어린 시절 서면은 지금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현 NC백화점 일대는 기계공작소가 대부분이었고 항상 쇠 냄새가 진동하였다. 그런 서면이 이제는 쇠냄새가 아닌 담배냄새로 가득해 나는 잘 가지 않는다. 물론 쇠 냄새도 좋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난잡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첫 번째 이사


이 집부터는 나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대연동의 조그마한 주택으로 이사하였고 마당이 있는 조그마한 다세대 주택이었다. 피란의 도시답게 산에 집을 많이 지었었는데 이 집도 언덕에 지은 신기한 구조의 집이었다. 마당 앞에는 감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고 주인 할아버지께서 가을에 직접 감을 따 나눠주셨다. 또 여기서 살면서 부산에 눈이 왔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 첫눈을 본 날이었다. 부산에 살면 눈을 보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10년도 못살아본 나에게는 정말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의 눈은 부산을 마비시키는 폭설이 온 날이었다. 마당에서 눈사람도 만들고 뒷산에 올라가 친구들과 포대로 눈썰매도 탔던 기념적인 날이었다.


우리의 두 번째 이사


내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보면 평범한 일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안 좋은 기억과 좋은 기억만 남아있는 것 같다. 이 집은 좋은 기억과 안 좋은 기억이 가장 많은 집이 되었다. 무려 20년을 이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첫 이사는 내가 10살 때이고 행복한 기억으로 아주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알려주신 새로운 주소로 설레는 마음으로 하교하였다. 화장실이 집안에 있고 샤워도 할 수 있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평범한 다세대주택이었다. 어머니가 열심히 모아서 2천만 원 전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정말 놀랍게도 이사 직후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어린 나는 그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시고 나와 동생은 집에서 누군가랑 같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 누군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할머니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기억은 나에게 없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퇴원하여 집에 있는 기억뿐이다 과정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프기 전 아버지는 거의 본 적이 없다. 항상 이른 아침출근해서 우리가 자는 시간에 들어오셨다. 그래도 어머니가 출근하실 때는 우리는 꼭 깨워 인사를 시키셨다. 그건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정말 찰나의 순간이다. 뇌졸중이라는 병은 정말 무서운 병인게 나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불편하니 삶의 의지가 꺾이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아픈 아버지를 8년간 보면서 느낀 생각이다.


중학생쯤 되니 나에게도 사춘기가 왔다.


나는 아픈 아버지가 밉지 않았다. 사실 아프다는 것이 가정에 큰 영향이 있을 거라고는 나는 크게 느끼지 못했다. 아마 어머니의 헌신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픈 아버지가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술주정하는 것이 싫었다. 나이가 어려도 생산성 없고 남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담배냄새는 사춘기의 나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니 이웃들이 많이 참아주신 것 같다. 그때의 트라우마로 나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의 죽음


병이라는 것이 오래되면 정말 무섭다. 모두가 지쳐가면서 감정도 메마른다. 어머니와 동생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나는 슬프지 않았다. 8년이라는 시간은 좋은 추억도 안 좋은 추억으로 뒤덮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 기억만은 선명하다. 나이가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된 기억인데 아마 5살쯤인 것 같다. 어머니께도 물어봤는데 그 정도 나이대라고 했었다. 그 찰나의 기억 말고는 5살의 기억은 없다. 초읍의 어린이대공원 호박꽃밭으로 둘러 쌓인 정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가 여우비를 피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마른하늘에 비가 내려 급하게 피한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서 아버지가 편의점으로 달려가 투명 비닐우산을 사 오셨고 그걸 3명이서 쓰고 간 기억이 몇 안 되는 아버지의 좋은 기억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년을 더 살았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돈이 없어서이다. 지금은 동생과 내가 성인이 되어 작은 아파트 한 채를 구매하였다. 두 번째 이유는 가난에서 오는 경험 부족이다. 우리 가족의 경제는 아버지가 아프고 어머니가 책임지셨다. 출판사에서 일을 하시다 결혼 후 경력단절이 있었음에도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셨다. 먹고살기 바빠 투자와 이사는 항상 뒷전이고 가난하면 당장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미래를 생각하며 철저한 계획이 필요한 대출은 우리에게는 미국만큼이나 먼 나라 이야기였다.

성인이 되어 문득 드는 생각인데 두 번째 기억의 집 보증금 그대로

20년을 살게 해 준 주인 할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등 떠밀려 온 용기


남자라면 다 가는 군대를 가게 되었다. 나도 이렇게까지 오랜 군생활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군대의 집단지성은 대단했다. 내가 몰랐던 각종 투자의 정보 특히 부동산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남들이 하는 부동산 투자와는 다른 길이었다. 나의 본가는 곧 재개발이 들어간다고 했다. 지금은 다 부서져서 없지만 20년간 함께해 온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집이 우리 소유였으면 아쉽지 않았겠지만... 후후

우리는 당장 실거주 주택이 필요해졌다. 처음에는 다시 전세로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젠 2천만 원짜리 전세는 없는 세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안전한 주거의 형태는 너무 싫었다. 우리 집 하나 없다는 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본가에 살 때는 불편함 없었던 것들이 군대에서 주는 조그마한 독신자 숙소보다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매매를 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와 같이 내 인생 처음으로 부동산을 갔다. 집을 알아보는 과정은 힘들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많은 아파트를 보며 어머니랑 동생과 의견차이도 많았지만 결국은 좋은 아파트를 좋은 가격에 매매할 수 있었다. 나에게 아파트를 구매한다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다. 특히 안 해본 것을 한다는 것이 정말 무서웠고 또 어려웠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나는 등 떠밀려 용기를 얻었지만 찾아보면 정말 좋은 정부 대출이 많이 있다.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


가난한 나는 나와 가족이 살 수 있는 실거주 집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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