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영화만평] 안팎을 제대로 살펴 매끄러운,<인사이드 아웃 2>
희로애락 등 모든 감정은 다 번뇌에 속한다. 기쁨도 예외가 아니다. 번뇌(煩惱)의 ‘번’이란 혼란시킨다는 의미고, ‘뇌’란 사유를 흔든다는 뜻이어서다. 그러니까 어떤 감정이든 규모만 다를 뿐 마음에 지진을 일으키는 거다. 성숙한 어른도 감정의 진원지를 살펴 관계에 신경 쓰는 마당에, 13세 사춘기의 라일리 앤더슨이 특정 감정에 치여 주변과 불화하는 건 불가피한 성장통이다. 그 심리적 기제를 다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2>가 ‘나’를 응시하게 한다.
영화는 라일리의 감정 하나하나를 인격화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를테면, 전편 <인사이드 아웃>에는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소심이, 까칠이 등이 등장하고, <인사이드 아웃 2>에서는 불안이, 부럽이, 따분이, 당황이 등이 새로 등장한다. 불안이가 기쁨이 등 기존의 감정들을 감금했다가 감정 본부 밖으로 추방하는 주도권 다툼이 가능한 설정이다. 전편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기쁨이가 라일리의 기억들을 쥐락펴락하며 라일리를 정의하려 했던 것처럼.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인간에게 생각이나 신념은 불변이 아니다. 신체적 변화가 아니더라도 ‘나’라는 정체성이 허상에 불과한 이유다. 죽을 때까지 열린 존재로서 되어가는 인간에게 그런 ‘나’의 한때일 현상은 자연스런 일이다. 감독은 그 사실을 기쁨이의 깨달음, “라일리는 우리가 정의할 수 없다.”를 통해 넌지시 일깨운다. 그렇다 해도 순간순간 뭇 감정에 노출된 복합적 자아일 ‘나’의 고유성은 일생토록 다져지기 마련이다. 상상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불안이의 모니터가 부정적인 상황들을 전송할 때, 라일리는 안 좋은 상상으로 잠을 설치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불안할망정 누우면 빠르게 잠드는 나는 라일리에게 없는 연륜의 지혜가 있는 게다. 등기우편을 보내고 돌아온 후 카드 지갑 분실을 알아채고 멘붕에 사로잡혔다가도, 치매 병동에 계신 어머니의 절망과 두려움을 대하고 돌아와 유리그릇을 놓쳐 파편 가득한 주방 바닥을 맥없이 내려다보다가도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곧 헤어났으니까.
당황하다가도 우울하다가도 평정을 되찾은 ‘나’는 또 깨질망정 균형 잡힌 다면체다. 하나의 감정에 파묻히면 다면체적 발효 시기를 놓칠 수 있다. 영화는 라일리를 도우려던 불안이의 과도한 개입과 기쁨이의 시행착오를 통해 그걸 암시한다. 피할 수 없어서 즐기려 하다 보면, “즐거우면 길이 막힌 게 아냐.”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도. <인사이드 아웃 2>가 산전수전을 맛본 중장년층에게 먹힐 수 있는 지점이다. 그만큼 비유 전달이 잘 된 애니메이션이란 얘기다.
라일리를 성장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 라일리는 사춘기의 격동을 이해하며 기다려 주는 부모와 살고 있고, 오해를 내던지고 먼저 다가와 손 내밀어 주는 두 친구가 있다. 칭찬과 격려와 응원을 해 주는 주변인들이 있기에, 라일리는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줄탁동시(啐啄同時)를 겪을 수 있는 게다. 그러면서 라일리는 자기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를 조율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안팎을 제대로 살펴 ‘인사이드 아웃’이 매끄러운 인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