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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Dec 28. 2023

남발된 상징, 부질없는 해석... 무엇을 위한 영화인가

오마이뉴스 게재, <역사의 미래>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126]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 출품작 <역사의 미래>

▲ 영화 <역사의 미래>는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JIFF) 국제경쟁부문 출품작이다. ⓒ 패밀리 어페어 필름


<역사의 미래>는 지난 7일 막을 내린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JIFF) 국제경쟁부문에 출품된 10편의 작품 가운데 하나다. 감독 피오나 탄은 1966년생 인도네시아 출신 여성작가로 암스테르담과 베를린 등지에서 작품활동을 해나가고 있지만, 극영화 경력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피오나 탄 감독은 이 영화에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을 오가며 유럽이 당면한 오늘의 문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전주국제영화제 안내책자는 이 영화를 짤막한 두 문장으로 소개한다.


"강도를 당한 후 기억을 잃은 남자는 잃어버린 과거와 새로운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는 유럽을 넘나들며 21세기 서구 사회가 직면한 혼돈과 위기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혼돈과 방황, 최근 유럽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자주 접한 이들이라면 이 같은 주제의식이 새롭지 않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201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를 비롯해 적지 않은 수의 작가들이 유럽사회가 당면한 혼란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전개했으니 말이다.


경제는 무너지고 연대는 끊어졌으며 곳곳에서 갈등과 폭력이 빚어지는 게 유럽이 마주한 현실이다. 종교와 철학은 현실 속 사람들을 구하기엔 너무나 뒤떨어졌고 과학과 경제는 너무도 냉정하다. 뒤처지고 고립된 사람들은 과연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역사의 미래>가 그리려 한 목적지는 아마도 이와 비슷한 어느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혼란과 단절, 방황과 고립을 다룬 많은 작품처럼 <역사의 미래> 역시 관객들에게 거대한 혼란과 좌절을 마주하게 한다. 관객과 영화가 단절되는 순간까지 심심치 않게 빚어질 정도다. 상영 중 고개를 돌리면 졸고 있는 관객을 찾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혼란과 단절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 스스로가 혼란스러워지거나 관객과 거리를 둘 필요는 없었을 텐데도 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


영화의 주인공은 한 남성이다. 그는 누군가로부터 폭행을 당해 과거의 기억을 잊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가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경험을 영화는 하나씩 보여준다. 그는 집에서 아내의 돌봄을 받다 집을 나오고 이후 유럽 각지를 떠돈다. 인물의 외모와 상황이 바뀌는 정도가 크고 영화가 이를 연속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주인공이 한 명의 실존하는 개인이 아니라 유럽의 현대인 전체를 표상하는 것도 같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전반적으로 영화는 일반적인 극영화와 같이 줄거리를 따라가며 이해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숨겨진 내용을 해석해야 하는 류의 작품에 가깝다. 영화는 시작부터 극장으로 거꾸로 걸어들어오는 관객들의 모습을 비추고, 이어 사고로 기억을 잃은 주인공의 상황과 그가 마주하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며, 중간중간 줄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영상을 삽입하는데 이들 사이엔 연관성이라 할 만한 것이 특별히 없다. 따라서 이들을 잇는 맥락과 고리를 찾는 작업이 곧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작업과 맞닿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상징의 해독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 익숙하거나 상징을 읽는 법을 훈련해왔거나 어느 정도 통찰을 가진이라면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역사의 미래>라는 제목은 노골적으로 윈스턴 처칠이 남긴 유명한 말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를 떠올리게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고 번역돼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남겼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던 이 경구는 '역사'와 '미래'라는 단어를 함께 쓴 것 가운데선 가장 유명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문장은 <역사의 미래>를 해독하는 유용한 길라잡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영화의 시작부터 기억을 잃는다. 그리고 집을 떠나 유럽 전역을 전전한다. 집을 떠난 후 그의 모습은 대부분 부랑자나 노숙인과 같이 그려진다. 그를 알아보는 여성이 있긴 하지만 그와 그녀의 관계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에게 그녀와 공유할 수 있는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여성과 없는 기억을 거짓으로 꾸며가며 하룻밤을 지내기도 하지만 이내 거짓은 탄로 나고 그는 쫓겨난다. 그가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무늬는 바탕만큼 중요한데

  

▲ 남발된 상징들은 명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영화 전체의 균형까지 무너뜨렸다. ⓒ 패밀리 어페어 필름


영화는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중에 몇 가지 영상을 지속적으로 삽입하는데, 본 에피소드보다 의미심장하다. 영상들은 무너지는 건물의 모습과 주인공을 두들겨 패는 한 남성, 풍랑에 흔들리는 배와 선적된 자동차들이 마구 움직이는 모습, 물속에 침몰해 있는 콩코르디아호 등이다. 붕괴와 혼란, 폭력과 침몰의 이미지가 기억을 잃고 무너져가는 주인공의 이야기 가운데 지속적으로 삽입되는 것이다.


같은 배우가 연기하고 있지만, 서사적 연속성 없이 유럽 전역을 배회하는 탓에 어찌 보면 낙오되고 고립된 유럽인 전체의 은유로도 읽힌다. 이 같은 이미지들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현대 유럽이 과거와 단절돼 붕괴와 혼란, 폭력과 침몰에 내몰렸다는 뜻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겪은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배와 관련한 몇 가지 영상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그중에서도 4년 전 이탈리아 연안에서 난파한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이미지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더욱이 콩코르디아가 고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조화와 평화의 여신 하르모니아의 로마식 이름이란 점을 떠올리면 침몰한 배에 선명히 적힌 'Concordia'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주인공은 어느 선술집에선가 자신과 닮은 알코올 중독자와 대화를 나눈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한 구절을 암송하는 그는 랭보도 보들레르도 아폴리네르도 읽지 않았을 게 분명한 남자와 자신의 아내가 바람이 났다며 신세를 한탄한다. 주인공은 자신을 뒤쫓아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그 사내를 향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발길질을 한다. 가장 나약하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폭력은 반복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이런 해석을 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앞 장면과 뒤 장면은 툭툭 끊어지고 표현은 전달되기 전에 허공에서 사라진다. 적잖은 관객들이 낮게 코를 골며 잠들고 가장 인내심 있는 관객들조차 박수를 아까워한다. 어설프게 남발된 상징들은 명확하지도 않을뿐더러 영화 전체의 균형까지 무너뜨린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일찍이 무늬가 바탕만큼 중요하다고 했는데 <역사의 미래>의 무늬는 바탕을 훼손하고 바탕은 무늬를 어지럽힌다.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 출품된 단 10편의 경쟁작 가운데 하나였던 <역사의 미래>. 내가 가진 최소한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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