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대학교에서는 객원교수인 나에게 숙소를 제공한다. 예년에는 학교 안에 있는 기숙사 중에서 부엌과 작은 샤워 부스가 딸린 기숙사를 제공해 주어서 3년 가까이 잘 사용했다. 그 후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된 후에는 집에서 편하게 수업을 할 수 있어서 더더욱 좋았다. 온라인 수업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업 직전까지 집안 일을 할 수도, 잠깐의 낮잠도 잘 수 있어서 너무나 편했다. 아마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옷 입고 수업해도 돼서 좋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학생들 얼굴을 보고 웃고 깔깔대며 소통할 수 있는 대면 수업이 훠~~ㄹ씬 좋다.
이번 달부터 드디어 학교가 문을 열고 캠퍼스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채 수업을 하게 되었다. 숙소도 이전처럼 제공되는데 이번에는 학교 기숙사가 아닌 학교 근처의 호텔로 숙소를 잡아 주었다. 호텔은 깨끗하고 청소도 해 주고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깨끗한 수건 및 아멘티 무한 제공 등의 장점도 있지만 기숙사처럼 완전 일정 기간 나만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체크 아웃할 때 완전히 내 짐들을 빼야 하는 불편한 점도 있다.
나는 일주일에 3박 4일을 거주하는데 부엌이 딸려 있어서 왠만한 식사는 내가 요리해서 먹곤 한다. 다행히 호텔 바로 앞에 슈퍼마켓이 있어서 왠만한 먹거리 재료들은 도착한 날 사서 마지막 날까지 탈탈 털어서 다 해 먹고 남는 음식 하나 없이 하고 나온다. 20년 내공의 아줌마가 아니면 해 낼 수 없는 스킬이다. 컵라면이나, 야채, 과일 한 두개 씩 사고, 쌀을 사서 밥을 지어 먹고 두부를 사다가 집에서 가져온 된장으로 된장찌개도 끓여 먹는다. 자연스럽게 채식을 하게 되어 건강은 덤!
무엇보다 내가 거주하게 된 방은 전망이 아주 끝내준다. 특히 방의 방향이 남동향이어서 아침에는 찬란한 햇살이 쫘악 들이친다. 아침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서 유투브로 바흐 음악을 틀어 놓고 앉아 있으면 내 자신이 정화되고 정신이 온전해 지고 마음이 경건해 지는 너낌적인 너낌이 들곤 한다.집에 두고 온 삼남매와 남편은 지지고 볶고 난리 방구를 끼며 엄마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엄마는 여기서 이렇게 쉬고 있단다. 물론, 오기 직전 밤 12시까지 나 없는 동안에 먹을 반찬을 밀키트 뺨치게 만들어 놓고 오느라 고생도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렇게 칸칸히 쟁여 놓은 음식들을 꺼내 먹지 않고 그대로 두고 라면이나 인스턴트 음식으로 배를 채워 나간 흔적들을 보면, 정말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대사가 절로 나온다.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으라고 다 해다 놨는데 왜 꺼내 먹지를 못하니?" 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의 어깨를 흔들어 주고 싶다.
그러던 어느날...바로 어제, 무슨 일인지 그 한산하던 호텔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뭔일이요? 리셉션 호텔리어에게 물었더니 근처 아파트가 레노베이션을 하는 바람에 거기 거주자들이 며칠 간 이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고, 덩달아 내가 머물던 방에 있던 손님들이 갑자기 머무는 기간을 늘리는 바람에 내 방도 어쩔 수 없이 바뀌게 되었다며 매우 미안해 하며 괜찮겠냐고 했다.
뭐, 내가 괜찮지 않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괜찮다고 하고 가 봤더니, 정말 괜찮았다. 비록 공간은 좀 더 좁았지만 내가 뭐 혼자 살면서 방 한 칸이면 어떻고 두칸이면 어떤가. 작은 부엌에, 퀸 사이즈 침대 딸린 침실에, TV 달린 거실과 작은 식탁, 사무용 책상...에구, 언제나 과분하다. 물론 이전 방보다는 좀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욕조가 딸린 화장실을 보는 순간, 에구 됐데이. 욕조 있으면 됐데이. 모든 것을 다 감수할 수 있었다. 이 추운 캐나다 땅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뜨끈한 욕조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그 순간, 그것은 넘나 행복한 순간이므로 모든 것은 다 괜찮데이다.
그런데, 아침이 되고 보니 밤과 달리 좀 실망이 되긴 했다. 사방이 건물로 꽉꽉 막혀서 바깥에서 전쟁이 나도 모르게 생긴 구석 방이었던 것이다. 전혀 바깥 경치가 안 보이다 못해 옆 건물이 다짜고짜 보여서 살짝이라도 커텐을 열지도 못할 처지였다. 에구, 그럼 그렇지... 그래서 호텔 직원이 그렇게 미안해 하며 괜찮겠냐고 괜찮겠냐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몇 번을 굽실 댔었구나... 싶었다.
아침이 되어 아침을 먹고 그 꽉 막힌 그 공간에서 일을 하자니 너무 답답했다. 이렇게 불평하며 내 하루의 기분을 서서히 뭉개고 앉아 있기 싫었다. 그래서 무작정 바깥으로 나왔다. 와우! 깜짝이야. 구석방에서는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바깥 날씨는 전형적인 캐나다 맑고 쨍쨍하고 코끝 찡한 겨울 날씨였다. 캐나다의 겨울 날씨는 완전 햇빛은 쨍쨍하지만 코끝이 찡할 정도의 추위를 자랑하는 날씨이다. 하지만 비록 기온은 낮아도(요즘은 거의 최저기온이 영하 15, 20도를 훌쩍 훌쩍 넘는다.) 해가 쨍쨍하니 기분은 훨씬 상쾌하다.
어디 카페 하나 찾아서 점심 시간까지 앉아 있으려고 했지만, 온타리오와 달리 여기 퀘벡 주는 아직 코비드 규제가 덜 풀려서 카페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쩌나... 커피나 한 잔 마시면서 놀면 쉬면 하려고 했는데...하지만 다시 호텔 방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어쩔 수 없이 학교로 갔다. 학교 도서관이 낫겠어. 하지만 오늘 나는 생각보다 운이 좋았다. 우연히 발견한 장소, 큰 통유리로 바깥이 시원하게 보이는 넓직한 공간을 발견했다.어머나, 이런 데가 있었어? 앞으로 쭉 나만의 아지트가 될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이 좋은 공간을 왜 이제서야 발견한 것이냐.
불평하며 호텔 방에만 있었다면 찾지 못했을 공간이었다. 학교가 워낙 넓으니 이런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오히려 답답했던 호텔 방이 나에게 이런 공간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아서 고마웠다.
학생들이 잔뜩 껴입고 학교로 활기차게 걸어 오는 모습이 훤히 보인다. 탁트인 사거리와 공원이 눈 앞에 쫙 펼쳐져 있다. 파란 하늘에 쨍하고 내리쬐는 아침 햇살이 어둑한 모든 기분을 날려 준다. 오전 세 시간 정도를 알차게 보내니 하루의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서 오후가 여유로울테니 오늘은 참 좋은 날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