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본 연극>
대학교 2학년 1학기 때 나는 무척이나 바빴다. 여대에 들어온 후 힘써 들어온 대학생활이 겨우 이런 정도의 재미밖에 없나 싶어 재수해서 남녀 공학 가겠다고 설치며 1학년 1학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내 동아리에 들어가 재미를 붙인 후부터는 열심히 놀아 제끼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을 지나 가을과 겨울 내내 신나게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고 맞이한 겨울 방학과 성적표.아,이래서 먹구 대학생이 되는 거구나... 이렇게 살다가 대학 4년 완전 무식쟁이가 되어서 졸업하는 거구나 싶었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2학년이 되서부터는 무엇에나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 공부도, 동아리 활동도, 뒷풀이, 과외 알바 등등...뭐든지 열심히 열심히.
그렇게 바쁘게 생활하며 학교 공부도 뒤질새라 열심히 했는데 그 때 들었던 과목 중에 하나가 <연극의 이해>였다. 꽤 재미있는 과목이었는데 그 수업의 과제 중에 하나가 연극을 하나 관람하고 거기에 대한 관람평을 써 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동아리는 저녁마다 모여서 공연 준비를 하느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모임이 끝나고 나면 뒷풀이 하느라 저녁 늦게까지 노느라 바빴다.그 시간을 쪼개어 연극을 하나 봐야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고 과제를 내야 하는 날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동아리 모임 직전에 잠깐 짬을 내어 근처 홍대에 가서 연극을 보기로 했다. 당시 나는 뭐 누구랑 꼭 같이 붙어 다니는 그런 류가 아니어서 혼자 밥도 잘 먹고 혼자 돌아다니기도 잘 하는 아주 씩씩한 아이였다. 학교에서 부리나케 홍대까지 가서 연극표를 샀다. 표 값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만원에서 만오천원 정도였던 거 같고 티켓을 사고 나니 차비도 간당간당할 정도였다. 공연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 홍대 거리를 돌아다녔고 문방구에 들러 작은 수첩을 사서 한 카페에 들어갔다. 거리로 창이 넓게 나 있었고 의자며 인테리어가 프로방스 풍의 화사한 느낌을 주는 예쁜 카페였다. 시간은 막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었기에 거리에도 가게에도 학생들이 붐비지 않고 한적해서 좋았다. 바람은 남풍, 시절은 사월, 화창한 봄날 오후,.. 고즈넉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상큼한 음악과 한잔의 커피,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였다. 혼자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랜만에 여유 있게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 읽어보면 너무나 감상적이고 유치찬란한, 개똥철학같은 글들이었겠지만 그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
연극 공연 시간이 다 되어 공연장으로 갔다. 내가 좀 부지런했던지 객석은 텅 비어 있었고, 관객들은 아직 아무도 들어 오지 않았다. 평일 4시 공연이니 관객이 많을 리는 만무했다. 조용한 객석에 앉아 얌전히 공연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무대에 ‘팟’하고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어어... 아직 관객이 입장도 하지 않았는데....그러나, 알고보니 관객은... 오로지 나 하나.
지금도 그 연극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부조리극이었기 때문에 스토리의 흐름은 무슨 구체적인 맥락이 거의 없었고, 배우들이 동문서답처럼 주고 받는 대사가 주가 되는 그런 연극이었다. 배우는 세 명. 관객은 달랑 나 하나.
‘관객이 하나면 어떤가 우리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이 있는 한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 정신으로 그들은 한 시간이 넘는 그 연극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의 그 예술 정신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 연극을 보는 내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모름지기 연극의 3요소는 관객, 배우, 희곡, 그리고 연극의 4요소라 할 때는 무대, 배우, 관객, 희곡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그 때 연극의 삼대 요소에도 사대 요소에도 빠지지 않는 그 중요한 관객의 역할을 매우 무겁게 수행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앉아 있었다. 그나마 배우는 무려 세 명이었다. 그들은 서로 의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홀로 매우 무겁게 내 역할을 해 내야 했다. 그 때 내가 생각한 내 역할은 바로 배우들의 연기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런 무거운 의무를 스스로 짊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냥 편하게 봐도 괜찮은데 말이다. 지금 저들이 관객을 웃기려는 거임? 그렇다면 웃어야지. 으하하하. 오바스럽게.저들이 실망스럽지 않게. 혹시 지금 감동 먹이려는 거임? 그럼 감동해야지 최대한 감동적으로....감동을 먹자...등등.
과연 배우들은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시간내내 그들과 호흡하느라 정말 힘들었다. 극을 다 마친 후 박수를 치는 것 또한 나만의 몫. 나는 손바닥이 시뻘게 지도록 박수를 쳤고 환호를 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극장을 빠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 참 특별하고 즐거운 추억이고 이야깃거리이다. 하지만, 이렇게 쭉 쓰다 보니 내 성격이 보인다. 남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약간 거짓과 오바를 보태더라도 최선을 다해 재미있는 척, 좋았던 척 하는 그런 거 말이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으로 뭐라고 정의하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이런 성격을 정의하는 말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스무 살에도 있었고 지금 50이 된 때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그 성격은 유전자를 따라 흘러가 내 딸에게도 그런 성격이 보이곤 한다...
하지만, 이젠 좀 그런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리고 싶다. 그냥 남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내가 편한대로 살고 싶다. 내가 만약 그 날 웃지도 않고 한숨도 쉬지 않고 박수도 대충 치고 나왔다면 어땠을까... 그 배우들 심기가 불편했을까. 모르겠다. 그러던지 말던지. 하지만, 이젠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한다 해도 그냥 안 웃기면 안 웃고 박수도 대충 치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제 남의 기분 신경 쓰느라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다. 둥줄기에 땀나도록 관객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고 싶지 않다. 그냥 관객으로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던 것인데 왜 좋은 관객이 되고 싶었을까... 그래서 이제는 내 있는 모습 그대로 타인의 시선이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여유를 갖고 편안하게 존재하려고 한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편안하게 존재해도 괜찮은 나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