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질이 가르쳐 준 삶의 낭만과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이민 가방 여덟 개에 담겼던 나의 청춘의 무게.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서 있는 버스 정류장처럼 단출했지만,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뒤통수가 싸한 느낌이었다. 밴쿠버는 따뜻하기 때문에 겨울옷이 필요하지 않다는 누군가의 말에 파카 하나 챙기지 않았던 그해 겨울은 우리에게 한 번도 따뜻했던 적이 없었다. 밴쿠버의 겨울은 우기이다. 온종일 소리도 없이 보슬비가 내린다. 세상이 온통 촉촉이 젖은 것처럼 마음 한편도 늘 축축했던 것 같다. 그해 겨울, 우리는 뼛속을 에는 추위를 경험했다. 우리 가족은 넷이다. 대부분 즐겨 입던 옷가지와 아이들의 군것질거리 약간 그리고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책 몇 권. 버릴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맡길 수도 없는 것들이 전부였다. 밥그릇과 국그릇, 숟가락과 젓가락, 당장 끼니를 끓일 수 있는 냄비와 프라이팬도 싸 들고 왔다. 신혼부터 손때 묻은 살림살이였다. 현지에서도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왜 그토록 고집하며 들고 왔을까. 지나고 보면 미련하게 보이는 일이 그때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여겨졌으리라. 우리가 고르고 골랐던 이민가방 목록에는 아이들의 젓가락이 있었다. 고사리손같이 앙증맞던 아이들의 젓가락. 나는 아이들에게 한글보다 젓가락질부터 가르쳤다.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젓가락질처럼 나의 뇌 구조나 가치관의 체계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 어쩌면 밥이나 반찬보다 스파게티나 피자를 더 자주 먹고 살 아이들이다. 밖에 나가면 젓가락보다 포크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될 아이들에게 내가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헝가리 출신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인간이 살면서 습득할 수 있는 지식 체계를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으로 나누었다. 학습을 통해서 머리로 배우거나, 반복적인 연습과 훈련을 통해 삶으로 배우는 지식. 젓가락질은 암묵적 지식에 해당한다. 이론보다는 셀 수 없는 반복을 거쳐서 젓가락질을 완성한다. 젓가락질은 손가락을 포함한 30여 개의 관절과 50여 개의 근육을 동시에 사용해서 이루어진다. 젓가락질이 뇌를 자극하는 비율은 30% 이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적어도 한국인에게 젓가락은 철학과 문화, 예절을 망라한 동양적 사고방식이 삶으로 함축되어있는 암묵적 지식이다. 게다가 재질이 미끄러운 쇠젓가락을 쓰는 민족은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인은 그 젓가락을 가지고 콩자반을 집기도 하고, 깻잎김치를 한 장씩 떼어내어 따뜻한 밥 한술을 싸 먹는다. 인격과 인격의 진솔한 만남, 밥상머리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본능이라는 원초적인 괴물을 길들이는 법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속도가 계산되어 있다. 젓가락질은 입으로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입으로 가르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동물은 모두 행동으로 보여주고, 삶으로 가르친다. 어쩌면 입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삶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들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머리로 배우는 지식을 넘어서, 가슴으로 배우는 지식이라야 거짓 없이 자신의 내면과 마주 설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왜 픽픽 쓰러지는 걸까.”
영화 클래식에서 자주 기절하던 주인공의 대사이다. 조회를 하다가 쓰러지고, 체육 시간에 운동장을 뛰다가 또 쓰러진다. 여주인공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말쑥한 사내아이. 모자챙 때문에 어긋나버린 입맞춤, 멋쩍게 돌아서다가 또 기절했다. 태수는 자신의 연애편지를 대필했던 친구로부터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기절을 했다. 단순히 키가 크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치다가 기절을 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고,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젓가락질이 힘들다며 투덜대던 아이. 포크를 쓰겠다는 아이의 당연한 저항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무엇을 가르치려 했고, 무엇이 못내 아쉬웠던 것일까. 걱정스러운 눈빛을 뒤로하고 뒷마당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나갔다. 2월의 화단, 얼어붙은 땅을 뚫고 꽃망울부터 밀어 올리는 한 송이 꽃이 피었다. ‘크로커스’라고 불리는 붓꽃과의 꽃. 꽃말은 청춘의 환희이다. 불멸의 요정을 사랑한 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신화처럼 시리디 시린 자줏빛으로 피었다 지는 꽃. 갑작스러운 영하의 추위에 얼어버리는 꽃이다. 기절도 학습되는 것은 아닐까.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랬다고 한다. 아버지도 나처럼 한 번씩 픽픽 쓰러질 때마다 무엇을 더 단단히 부여잡거나, 놓으려 했던 것이 있었을까. 아이들은 젓가락질을 줄곧 잘해왔다. 지금은 내가 처음 기절을 했던 나이가 되어버린 아이들, 스파게티면 한 가닥을 길게 들어 올리고, 젖힌 목구멍 속으로 삼킬 줄 아는 낭만을 즐긴다. 젓가락질이 가르쳐준 삶의 낭만과 꽃 한 송이 피었다 졌던 이른 봄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삶이 가르쳐 준 것들과 삶으로 배워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했던 낭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