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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톱을 먹은 쥐 Feb 28. 2022

의미있게 실패하는 방법

진 시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던 형가 이야기

친구에게 고민을 얘기하다가 듣게 된 이야기 입니다. 그 때는 한 인물에 두 가지 재능이 있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으로 인용된 것인데 다시 생각나서 찾아 읽어보니 어떻게 하면 잘 실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은 위키백과를 중심으로 요약해 읽기 편하도록 다시 적었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어느날 기회가 찾아왔다

  형가는 전국시대 위(衛)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하는 방법을 배워 귀국 후 관료에 뜻을 두고 위왕을 비롯한 여러 군주들을 찾아다니며 국정에 대한 논의를 펼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좌절한 형가는 이후 연(燕)에 들어가 시전 바닥에서 술꾼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형가는 여전히 독서를 좋아했고 각지에서 찾아온 현인과 호걸, 덕망 있는 자들과 교분을 맺었으며, 현지 유력자 전광(田光)의 눈에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秦)에서 인질로 잡혀있던 연의 태자 단(丹)이 도망쳐와 훗날 진 시황제가 되는 정(政)에게 자객을 보내기로 합니다. 단은 이를 의논하러 전광을 찾아오는데 이 때 전광이 형가를 추천하게 됩니다.


진왕에게 다가가 암살할 방안을 궁리하다

  자객으로서의 의뢰를 받은 형가는 조심스럽게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암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계획에는 세 가지가 필요했는데, 진시황의 바로 옆까지 다가갈 수 있는 선물 두 가지와, 단칼에 죽일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첫 번째는 연에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인 독항(督亢) 땅으로 단이 독항 지방의 지도를 내어주었습니다. 지도를 넘겨주겠다 함은 당시에는 곧 그 땅을 넘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과거 진의 장군이었으나 간언하다 정의 노여움을 사서 일족이 처형되고 연으로 망명해 온 번오기(樊於期)의 목이었습니다. 단은 이를 거절했으나, 형가가 번오기에게 직접 찾아가 「상금이 걸려 있는 당신의 목을 대가로 내가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죽일 수 있다면, 분명 억울함도 수치도 벗겨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설득하자 번오기는 기꺼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잘라 형가에게 내어줍니다.

놈을 죽이는 데 필요하다면 가져가십시오

  세 번째인 무기는 단이 암살에 쓰기 위한 예리한 비수를 천하에 영을 내려 수소문한 끝에 조나라 사람 서부인(徐夫人)의 상절(霜切)이라는 비수를 백금을 주고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 비수에 독을 바르고 시험삼아 베어보니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진왕에게 다가갔으나 암살은 실패하다

  진의 수도 함양에 당도한 형가는 영토 할양의 증표인 지도와 번어기의 목을 진왕에게 바치는 형식을 취하며 진의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다. 진왕 정은 크게 기뻐하며 구빈(九賓)의 예로 형가를 맞아들이게 했습니다. 형가는 직접 진왕 정에게 지도를 해석해주겠다며 가까이 접근했고, 두루마리로 된 지도를 풀자 두루마리 끝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검이 나타났습니다. 형가는 비수를 잡고 진왕의 소매를 잡아 그를 찌르려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진왕의 옷소매만 끊어지고 진왕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진의 법률에는 신하가 어전에 무기를 갖고 오는 것이 사형으로 다스려질 정도의 중죄였고, 병사들도 왕명 없이는 함부로 전상(殿上)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진의 신하들은 왕을 도울 수 없었고, 진왕 정은 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여 이를 뽑지 못해 위기에 몰렸으나, 결국 신하들이 물건을 던져 방해하는 사이 진왕이 뽑은 검에 맞아 형가는 처참하게 처형되고 맙니다.

  암살당할뻔 했던 진왕은 격노하여 이듬해 기원전 226년, 연을 쳐서 수도 계(薊, 지금의 베이징)를 함락시켰고, 암살 음모의 주모자였던 태자 단은 연왕의 명에 따라 화해 교섭을 위해 살해되었지만, 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기원전 222년 연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고 맙니다.

YAN이 연, QIN이 진 입니다


형가는 죽었지만 그 뜻은 남아있네

사마천(司馬遷)은 『자객열전』 말미에서 비록 그 암살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품은 뜻의 높이 때문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과거 형가와 싸웠던 노구천도 진왕 암살미수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가 확실하게 사람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안타깝다. 그리고 그런 인물을 호되게 꾸짖었던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필시 나를 미워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한탄했다고 《사기》는 전하고 있으며,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영형가(詠荊軻)』라는 시를 지어 「형가는 죽었지만 그 뜻은 남아있네」라고 읊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실패뿐이었던 삶을 살았지만 심지 하나로 강대국의 왕에게 맞섰던 「의사(義士)」로서의 행동이 남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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