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모 May 11. 2019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재현적 이미지의 죽음을 선언한 영화계 최후의 현자 고다르

                        

많은 평론가들은 고다르 감독의 <언어와의 작별>을 스탠 브래키지의 <독 스타 맨>(1964)과 비교한다. 우리는 놀랍게도 반세기가 지나도록 고다르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천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작별은 어떤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가 아니라 일종의 전선(Front line)을 형성하는 선언 같은 것인데, 조너선 로젠봄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특정 언어와의 작별이 아니라 500년에 걸친 이미지 지각의 역사와의 싸움이다.”


                                                                                                                                   

장 뤽 고다르는 2004년작 <우리들의 음악 Notre Musique>에서 사라예보의 유럽문학제에 참가한 교수로 출연해 거기서 학생들에게 영화의 쇼트/역쇼트가 어떻게 세계 내 모순을 드러내고 존재의 아포리아를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이미지와 텍스트, 삶과 죽음, 픽션과 다큐멘타리,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그러한 쇼트/역쇼트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엘리노어성은 실제 존재하지만 이곳을 배경으로 한 햄릿은 허구의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들은 햄릿만을 기억한다. 엘리노어성은 실재계지만 햄릿은 상상계에 속한다. 하지만 의미론적으로 실재계에 속한 엘리노어성은 불확실하지만 상상계에 속한 햄릿은 확실하다. 할리우드의 발명품인 쇼트/역쇼트가 정치적인 까닭은 그것이 특정의 시점을 구조화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주입하기 때문이다.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강제분할 정책으로 이듬해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아랍계를 중심으로 70여만명의 난민이 발생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엑소더스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엑소더스는 오히려 폴 뉴먼이 주연한 1960년 영화 <영광의 탈출 Exodus>에 나오는 20세기 유대민족의 고난과 영광의 외관을 입은 이스라엘 건국신화로서다. 동일한 사건에서 이스라엘은 픽션이 되었던 반면 팔레스타인은 다큐가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고다르는 2010년작 <필름 소셜리즘 Film Socialism>에서 할리우드가 바로 유태인에 의해 발명되었음을 밝힌다. 아돌프 주커, 윌리엄 폭스, 데이빗 셀즈닉, 사무엘 골드윈, 마커스 로에, 칼 램믈러 기타 등등.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영화는 역사에 총체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함 포템킨>에서 1905년의 반란사건을 분리해낼 수 없듯 <아리비아의 로렌스>에서 T. E. 로렌스의 생애를 분리해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볼 때 그것은 이미 해석된 현실로서의 역사다. 즉 그 이미지란 재현된 것 혹은 매개된 것이다. 그래서 고다르는 영화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왜곡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언어가 오염됐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소리로 주조하는 영화언어는 그 핍진성(verisimilitude)으로 말미암아, 혹은 이미지의 과잉을 통해 현실에 너무도 많은 관념을 끌어들인다. 이미지들이 자연의 진상을 가린다고 이야기할 때 고다르는 마치 플라톤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영화라는 매체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역사적 층위로 불러들인다. 

일례로 고다르는 비디오 연작 <영화의 역사(들) Histoire(s) du Cinema>의 ‘치명적인 아름다움' 편에서 <젊은이의 양지>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이미지와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의 이미지를 느린 화면으로 병치시킨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은 2차 대전 기간에 미군에 소속돼 유럽의 전장에서 여러 역사적 순간들을 다큐멘타리로 촬영했는데 그 중에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잔혹한 장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 스티븐스 감독은 이상하게도 멜로드라마에 집착했는데 그가 1951년 <젊은이의 양지>를 만들었을 때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아름다운 이미지에는 필연적으로 잔혹한 학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는 게 고다르의 생각이다. 고다르는 이렇듯 겉으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몽타주를 통해 역사의 은폐된 맥락을 들추어낸다.



여기서 변증법적 몽타주는 역사가 하나의 서사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해독제 같은 것이다. 프랑스어 histoire는 ‘역사'이면서 동시에 ‘이야기'라는 뜻을 지녔다. 역사는 결국 이야기 형식으로 드러나지만 만일 그것이 하나의 거대서사로 환원되어버린다면 그것은 또 다른 환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야기라는 것이 본디 역사에 접근하는 단초를 제공하지만 또한 그것을 어떻게든 왜곡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19세기에 문학과 회화가 했던 역사 기록의 기능을 전수받아 20세기에 그것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영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것이 마르크 페로처럼 역사적 사료로서의 영화의 가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다르는 단순히 영화가 어떻게 역사를 기록하였는지 혹은 어떻게 왜곡하는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역사와 영화가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에 대해서 사유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역사에서 수행된 영화의 매체적 기능을 살펴보는 대신 영화의 역사 자체를 탐구한다. 그것이 1988년에 시작되어 1998년에 마무리된, 영화적 관점에서 사유한 20세기 역사에 대한 성찰인 <영화의 역사(들) Histoire(s) du Cinema>이다. 물론 이는 영화사의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다. 총 8편으로 구성된 <영화의 역사(들)>은 제목에서도 암시하듯 하나의 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억압되고 은폐되었던 무수한 영화의 역사(들)적 국면들을 8개의 주제 하에 변증법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작업이다. 

고다르는 59년도 장편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로 현대 영화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이래 단 한 번도 ‘방법(method)과 정서(emotion)'라는 화두를 내려놓지 않은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영화작가다. 영화에 대한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언제나 언어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우리들의 음악>에서는 통역의 문제를 던지는데 예를 들어 전쟁의 주인공은 경험을 전할 능력이 없고 이야기꾼은 자신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야기꾼의 문제는 능력과 양심의 불일치에 있다. <필름 소셜리즘>은 돈이 공동선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란 여전히 가능한지 묻는다. 현대사회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행위가 돼버렸다. 로만 야콥슨은 의미로부터 소리를 분리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지만 그저 말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변장한 그의 정체를 알아본 유일한 존재는 그의 개였다. ‘관념은 우리를 분리시키고 꿈은 우리를 가깝게 만든다.’


하지만 언어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영화언어는 영화의 형식을 규정한다. 2004년에 <우리들의 음악>은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을 대신해 영화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했다. 그리고 마치 이를 입증해보려는 듯 2010년에 <필름 소셜리즘>은 (제목의 연상과는 달리) 실제 100% 디지털로 촬영된다. 지중해에 떠 있는 거대한 유람선은 몰락하는 유럽을 떠도는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을 연상시키는데 영화촬영 2년 후, 유람선은 실제로 이탈리아 해안에서 침몰하여 최후를 맞는다. 영화와 역사가 교차하는 기묘한 순간이 있는데 그것이 고다르의 미학이 그의 윤리학과 만나는 지점이다. 유람선 나이트클럽의 사이키 조명 아래 춤추는 사람들의 천박함에 대해 고다르가 저화질 휴대폰으로 조야하게 담아낸 그 흔들리는 영상에서 누가 파국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Quo Vadis Europa (유럽이여, 어디로 가는가!)

상상 가능한 유토피아의 꿈은 현실에서 점차 폐허가 되어간다. 20세기의 유산인 필름과 소셜리즘은 이제 현실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희미한 존재들인데 고다르의 카메라는 바로 그 사라져가는 존재, 유령 같은 존재에 시선을 던진다. 화가의 시선이기도 한 이러한 구도는 일찍이 고다르의 60년대 영화들에서 선언되었던 미학적 요구들이다.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에서 고다르는 미술비평가 에리 포레(Erie Faure)를 인용한다. “벨라스케스는 더 이상 사람을 그리지 않았고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그렸다. 그는 대기의 화가였다." 그리고 <남성 여성 Masculin Féminin>에서는 인상파 화가 끌로드 모네를 인용한다. “당신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그려야 한다."


이 문장은 고다르의 2014년도 영화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에 다시 등장한다. 고다르의 121번째 영화는 3D로 제작되었는데 놀라운 점은 일반 입체영화와는 정반대 의미의 3D라는 것이다. 디지털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3D영화에서도 고다르는 거의 해체론적 방법으로 기술을 전복시킨다. 50여명 이상의 보조스탭이 필요하다는 3D영화 제작방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일반 DSLR 카메라 두 대를 이용해 촬영하고 이미지를 겹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거기다가 고의적으로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든지 좌우 카메라를 따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스크린에 낯설고 이질적인 상들이 나타나게 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현기증과 구토를 불러일으켰다. 고다르는 3D의 추상을 한 겹 벗겨내 물질적 토대의 거친 봉합선들과 그 틈새들을 열어 보임으로써 매끈한 스펙타클의 환영 아래에 있는 실재의 추한 민낯을 드러낸다. ‘주의 : 이 영화는 현기증과 구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구토는 원근법 회화에 대한 입체파의 응대처럼 트롱프뢰유(trompe-l'oeil)에 대한 하나의 도덕적 환대가 될 것이다.

“어떤 기술이든 막 나왔을 땐 규칙이 없다. 3D도 규칙이 없다.” 그는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단지 언의의 자의성, 그러니까 자연의 불가해성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출현으로 자연과 언어의 심연은 더욱 깊어졌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렬.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렬. 시선의 결렬. 초점의 결렬. 시간의 결렬. 플롯의 결렬. 언어의 결렬. 언어의 파괴는 언어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인가, 아니면 죽음의 세계로의 초대인가? ‘언어와의 작별’이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스위스 보드(Vaud)지방 방언에서 Adieu은 두 가지 의미, 즉 만남의 인사와 작별의 인사를 모두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테크놀로지의 땅에 핀 푸른 꽃이 아니다. <언어와의 작별>은 고다르가 가능한 한 관념이 사라진 영화를 찍고 싶다는 소망에서 만든 영화다. ‘상상력이 결핍된 사람들은 현실에서 피난처를 찾는다. 문제는 비사유가 사유를 오염시키느냐이다.’ SF작가 A. E. 반 보그트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일관된 내러티브 없이 몇 개의 단편적 장면들만이 퍼즐처럼 흩어져 있다. 유부녀와 독신남이 만나 사랑을 나눈다. 개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여자는 남편과 다투고 한 사내가 살해당한다. 계절이 바뀌고 남녀는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눈다. 개는 그들의 집에 함께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커플이 등장해 사랑을 나눈다. 개는 여전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자연’ 장과 ‘은유’ 장으로 나뉜 에피소드들이 번갈아 나타나지만 여러 행위들만 나열될 뿐 딱히 사건으로 불릴만한 사건은 없으며 행위들 사이의 인과관계도 불명확해 그것의 의미 또한 모호하다. 그러므로 내러티브를 통해 어떤 관념을 세우거나 교훈을 얻기는 힘들다. 1816년 제네바 호수에서의 바이런경과 메리 셸리의 역사적인 만남의 장면이 이례적으로 삽입되었지만(그녀는 이곳에서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한다!) 내밀한 연관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도시와 자연을 떠돌아다니는 개 록시(Roxy)의 여정이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룬다는 사실이며 문제는 우리가 록시의 행동과 언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영화를 더욱 불가해하게 만드는 것은 군데군데 록시가 꾸는 꿈 장면과 회상 장면 같은 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언어와의 작별>은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의 고다르 버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우연의 행로에 던져진 한 당나귀의 여정을 마치 성자의 삶처럼 거룩하게 바라보았던 로베르 브레송보다 고다르는 한 발 더 나간다. 이제 인간보다 동물에게 신뢰를 보이는 고다르는 인간에게 보다 동물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윤리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동물의 소리는 충만하되 과잉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의 소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 인간의 탄식이다. 그는 전매특허와도 같은 활자놀이를 통해 영화제목 '언어와의 작별(Adieu Au Langage)'에서 인간의 탄식을 끄집어낸다.

AH DIEU (아 신이여)
OH LANGAGE (오 언어여)

개가 울부짖고 아기가 옹알이를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울림이 있는데 왜냐면 억압된 역사 혹은 망각된 역사는 오직 동물적 울부짖음이나 신음의 메아리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세상이 끝나는 소리는 쾅하는 소리가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다”라고 얘기했던 T. S. 엘리엇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좀 더 신중하게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에필로그를 떠올릴 수도 있다. ‘돌이 말하기 시작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