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롭지엥 Nov 10. 2020

코로나로 그녀가 죽었다.

무섭지만 또 견뎌내야 하는

코로나로 죽었다. 그녀가 코로나에 걸려 죽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달달한 내음의 필리핀 전통 디저트를 권하던,

밝은 미소가 너무 예뻤던,

예쁜 눈을 가진 두 아이의 엄마였다.





영국에서 살다가 네덜란드로 이사를 왔습니다.


새로운 곳에서의 설레는 시작.

풍차와 운하가 멋들어진 곳.

나에겐 히딩크의 나라로 기억되는 이 곳에 오면  나는,

매일매일 그 유명한 튤립을 사다가 화병에 꽂고, 콧노래를 부르게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설렘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럽에, 네덜란드에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이삿짐 정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 학교에서는 '홈스쿨링'을 결정하였습니다.

코로나로 락다운, 봉쇄로 인한 조치였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학교 친구들 이름도 못 외웠는데,

어색하게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온라인 수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정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삿짐 박스더미와

온라인으로 숙제한 것을 '인증'을 해달라는 담임 선생님의 메시지를 째려보면서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영국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 너 그거 들었어? 제니... 제니가 코로나에 걸려 죽었어. 저번 주에.............."


..........................................................



죽었다니, 코로나로 죽었다니....

내가 아는 사람이 코로나로 죽었다니.............

제니는 간호사였습니다.  영국의 한 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코로나 환자를 돌보게 되었고, 코로나에 전염되어 일주일 만에 증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깜짝 놀랐고, 너무, 아팠고..... 두려웠습니다.

아직 어린 두 딸을 두고 어떻게 갔을까?

40이 막 지난 젊은 성인 여자도 이렇게 코로나에 쉽게 무너질 수 있나?


그때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는 저에게 무서운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한 가족의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간 무서운 병.

어린 두 딸을 두고 가야만 했던 제니.


뉴스에서는 연일 코로나라는 단어가 흘러나왔고, 사망자와 확진자의 그래프를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났습니다.

코로나라는 말만 들어도, 그 슬픔과 두려움과 공포감에 두통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손소독제로 범벅을 한채

보이지 않는 공포와 스스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뉴스에서는 일일 확진자가 3 자릿수였다 오늘은 2 자릿수가 되었다 연일 발표를 합니다.

거리두기 단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가, 완화시켰다고 했다가 또 강화한다고 했다가...

확진자가 나온 건물은 폐쇄 후 소독을 하고, 접촉자들을 조사해서 격리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네덜란드에는,

내가 지금 네덜란드에서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한국과 달라서, 코로나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행동이 너무나 달라서입니다.



개인정보법에 저촉이 되어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학생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는데, 해당 학년에 해당하는 학생들에게만 '발생 통보'를 해줄 뿐, 학교 폐쇄와 소독은 안 합니다.


혹시나 코로나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학교에 나오지 말고, 코로나 검사를 받아보라고 합니다.

증상이 없는 학생들은 학교에 계속 나오면 된다고 합니다.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다수이고,

'아이들은' 코로나에 잘 걸리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무엇이 맞고, 그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위험한 시기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더 이상의 아픔이 없도록, 모두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