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나는 빨리 죽고 싶었다.
한 50살, 아니 늦어도 60살쯤에는 죽고 싶었다.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도 아니었고, 인생이 그쯤 되면 지겹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냥, 그 나이 때쯤이면 성큼 다가올 육체적 노화가 싫었다. 더 정확히는, 마음껏 걷지 못하는 삶, 나는 그런 삶을 살 바에 죽음을 택하고 싶었다.
두발(Two feet) 자유. 나는 단순해서, 두발이 자유로울 때 행복하다. 그래서 우울해도 나가서 좀 걸으면 행복해지고, 제일 좋아하는 일이 새로운 장소를 걷는 것. 그래서 마음껏 걷지 못하는 삶 따위는 경솔하게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쯤, 걷는다는 행위가 즐거움보다 무릎의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날. 자연스럽게 눈 감고 다음날 떠지지 않는 다면. 그만한 삶의 축복이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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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우연히 본 영상. 현대자동차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영상. 그 영상에서는 꼭 원숭이처럼 생긴 키 작은 로봇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근데 사실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뒤로 백텀블링은 두 바퀴씩 한다던가. 꼭 봉춘 서커스단, 애니메이션에서나 볼법한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아! 이거다 싶었다.
지금 당장은 무리지만,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 수어 번 지난다면. 그때의 싸-이언스라면, 다 닳아버린 내 도가니 대신 저런 멋진 다리로 교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도 나이 60살에도 저렇게 백텀블링 따위는 수어 번 할 수 있을 텐데. 게다가 로봇 다리는 고통도 못 느낄 테니, 레고를 밟거나 새끼발가락을 찧고 땅바닥을 구를 일도 없는 건 덤이다.
아니지. 다리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때의 싸-이언스라면,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나의 눈도 개미 더듬이도 보일 10.0이 넘는 눈으로 바꿀 수 있겠지. 태어난 이후 평생 쉰 적 없는 나의 심장도 이제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하고, 새로운 기계 심장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 나이 먹어가면서 잊어가는 수많은 추억들. 가까운 가족, 친구, 사랑마저 잃어버리게 하는 치매에서도 벗어나 SSD(그때는 더 좋은 저장장치가 생기겠지만)에 저장해서 영구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이렇게 될 바에 차은우 닮은 키 190cm의 로봇에 내 뇌를 이식할 수도 있겠다. 차은우 보다는 ‘지구용사 선가드’ 같은 거대 변신 로봇이거나 티라노사우르스 모양의 로봇도 좋겠다. 아니, 나이가 들어가는 뇌를 이식하기보다는, ‘나의 기억’ ‘나의 자아’만 로봇에 심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굳이 형상이 있을 필요가 있나? 끊임없이 흐르는 메타버스 안에서 비트와 바이트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난 살아있는 건 맞는 걸까? 존재하는 건 맞는 걸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넘어간다. 그러면서 드는 고민. 나는 뭐지? 아니 그때의 나는 인간이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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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 언젠가. 비트코인이 10조를 돌파하고, 지구온난화로 부산이 아틀란티스가 되어버릴 그 언젠가. 노인이라는 말은 사장되지 않을까? 죽지 못하는 삶, 죽지 못해 사는 삶, 죽지 못하게 하는 싸-이언스로인해 불멸의 삶이 인류의 가장 큰 고난이 된다면. 그때의 인류는 사람일까? 사람은 어디까지가 사람이고, 무엇이기에 사람은 사람인 걸까?
여하튼, 나는 도가니 나간 노인보다는 지구 용사로 변신하는 거대 티라노사우르스 로봇인 쪽이 좋겠다.
싸-이언스만 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