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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Sep 22. 2021

1년 후 죽는다면?

210922


#1년 후 죽는다면? 


나의 취미는 계획표 짜기.


특기는 계획대로 안 살기인 나는, 항상 불만이었다. 인생은 왜 내 동의도 없이 시작하고, 인생의 끝은 느닷없이 찾아올까? 당사자의 동의 없이 태어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태어날 때, 이마 정 중앙에 죽는 날짜가 턱 붙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인생을 ‘전략적’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인생은 쉐도우 복싱과 같다. 언제 죽을지 몰라, 평생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를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헛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다 덜컥 인생의 끝이 찾아온다. 평생 벌어 둔 돈이나, 매달 꼬박꼬박 납부한 보험. 어쩌고 저쩌고 담보 대출을 겨우 다 갚아 드디어 은행에게서 찾아온 내 집까지. 모두 두고 떠나야 한다. 대신, ‘나중에 해야지’, ‘언젠간 해야지’, ‘죽기 전에 꼭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하나같이 모두 못 이루고 떠난다.


언제 죽을지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인생에 ‘적당한’ 공부도 가능하고, ‘적절한’ 직업도 찾을 수 있을 텐데. 가령, 내 인생이 40에 끝이 난다고 한다면, 학자금 대출의 노예가 되는 선택이 아니라, 곧장 일부터 시작했을 거다. 노후 준비 같은 것은 당연히 필요 없다. 그저 적당히 벌어, 내 인생 40까지 다 쓰고 갈 거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내 통장에 딱 0원 남기고 이 세상에 미련 없이 떠날 거다. 게다가 하고 싶은 일들을 미루지 않고 그때마다 했을 테니, 이거만큼 전략적인 삶이 있을까?


그래도 이제서라도 1년이라는 시간만 남았다고 상상하니 오히려 기쁘다. 오히려 좋다. 나의 취미인 계획표를 짜서, 누구보다 전략적으로 1년을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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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12달. 연습장을 꺼내어 선을 벅벅 긋는다. 우선, 남은 인생의 2달은 여생의 십일조라고 생각하고 봉사활동을 가고 싶다. 그래서 예전에 잠시 근무했던 난민학교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 위치는 밥맛이 좋은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같은 곳이 좋겠다.


그리고 다른 두 달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쓸 작정이다. 파울로 코엘뇨의 ‘순례자’ 책 하나와 간단히 배낭을 꾸려 산티아고 길로 떠날 거다. 신발만 내 돈 다 털어서 제일 좋은걸 신고 갈 거다. 뉴발란스 991 정도가 좋겠다. 그리고 산티아고 길을 최대한 천천히 걸을 거다.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면 그날 거기서 누워 자버릴 거고, 아침 해든 늦은 오후 해든 먹음직스러운 햇살이 반긴다면 그 햇살에 커피를 홀짝일 거다. 세계에서 가장 산티아고 순례길을 속 터지게 걷는 사람으로 기록될 거다.


그다음은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서, 그리고 여행 자금 모으기 위해서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하겠지. 매일 밤마다 달리기는 빼놓지 않고 할 거다. 맛없는 샐러드도 계속 먹을 거다. 그리고 돈도 다 갚고 하고 싶은 일들 다 마쳤을 때는 하나하나 나의 흔적들을 지구 상에서 지워나갈 거다. 이 글은 그때쯤 사라질 예정이다.


그리고 죽을 날이 내일로 다가온다면, 저 멀리 아무도 못 찾을 바다로 떠날 거다. 내가 죽었을 때 옮기기 쉽게 관도 챙겨갈 거다. 그리고 불꽃놀이 도구도 챙길 거다. 그래서 푸른 별과 파도소리 사이에서 불꽃놀이를 조용히 하면서, 인생 끝 날, 처절한 궁상을 떨 거다. 펑펑 터지는 요란한 불꽃놀이보다는 내 손에서 조용히 터지다 쪼그라드는 녀석이 좋겠다. 그렇게 내 인생 같던 하찮은 불꽃놀이를 다 즐기고는 관에 누울 거다. 양 대신 저 별을 세면서, 다음날 눈이 안 떠지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내일 죽는다는 소식이 가짜 뉴스가 아니길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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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참 좋다. 그러면서 이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곧 죽어야 내가 행복해지는 삶을 살 수 있다니. 지금은 산티아고 순례길은커녕 집 근처 여행도 회사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인데. 코로나로 외국은 꿈도 못 꾸는데. 곧 죽을 거란 생각에 비로소 내가 진짜 하고 싶은걸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퇴근으로 본다고 한다. 그들에게 하루란 내가 온전히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 내 마음대로 못 사는 삶, 직장에서의 시간은 죽은 시간, 내 것이 아닌 시간이라고 한다.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삶의 2/3를 마음대로 못쓴다면 노예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린 다 일의 노예다.


웃기다. 죽어야지 나의 하루가 생긴다. 살고자 하면 다 죽은 시간 속에서 산다. 하루살이처럼 차라리 내일. 아니다. 내일은 심했다. 여하튼, 죽는 날을 안다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노후의 안락함을 위해 쉐도우 복싱을 안 할 수 있지 않을까. 쉐도우 복싱 대신 나의 하루나 하루 더 살다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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