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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 Valerie Mar 20. 2019

가장이라는 어깨의 짐

남편의 통장을 발견하다.

'사업자등록증이 어디 갔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무실 이곳저곳을 뒤지다 발견한 처음 보는 농협 통장.

남편 것으로 보이는 이 통장 앞에는 'XX대학교 급여통장'이란 글씨가 써져 있었다.


'이 인간이 나 몰래 이쪽으로 돈을 모으고 있었구먼? 어쩐지 강의료가 어디로 들어오나 했네!

딱 걸렸어!'


마치 겨울 옷을 넣고 봄 옷을 꺼냈는데 외투에 잊고 있던 오만 원권 지폐가 나온 신난 마음으로 얼마나 들어있나 확인하려는데 칠칠치 못하게 통장을 놓쳐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통장 뒷면에 써진 남편의 손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현지와 귀한 아들 하준이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다.
아름다운 HJ family에게 울타리 같은 아빠가 되자.
2018.8.23



2014년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부푼 꿈을 안고 함께 창업을 했다. 사업자금은 남편 적금통장을 깨 시작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2016년 온라인 서비스를 접으며 동시에 결혼을 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사업이 망했는데 결혼 안 하고 도망갔으면 지구 끝까지 찾아와 날 때릴 것 같아서 결혼해줬어라고 농담을 하곤 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임신을 했다. 임신과 동시에 나는 자연스레 "태교"를 한다는 이유로 사무실을 나가지 않았다. 사업이 잘 안돼 이제 어떡하지? 란 혼란 속에 난 집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가장이었던 남편은 그럴수가 없었다. 온라인 서비스는 접었으나 돈을 벌어다 주는 비즈니스 모델인 행사 기획 일을 하며 혼자 고군분투하며 다시 사업 방향을 잡으려 노력했다. 동시에 개인적으로 들어오는 강의며 행사를 뛰며 돈을 벌었다.


임신과 동시에 입주돼 있던 서울시 입주공간이 이사를 가게 돼 함께 옮기게 됐고, 난 새롭게 이사 가는 사무실에 이사 한 날 빼고는 자주 오지 못했다. 중간중간 사무실에 직원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오래 함께 하지 못했고, 결국 남편은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됐다. 배불뚝이던 난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생각하는 방향들을 조언해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잘 몰랐지만 우리에게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한동안 남편의 모습이 많이 쓸쓸해 보였다. 몇 달 뒤면 세상에 나올 아이가 있단 사실이 가장의 어깨를 더 짓누르는 것 같았지만 그런 남편을 도와줄 수 없어 항상 미안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남편이 스스로 고민하고 길을 찾아갈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거라 생각했다.


항상 모든 답은 본인 스스로에게 있기에 말이다.







난 요즘 남편의 고민한 흔적들이 남겨져 있는 사무실에 앉아 내 고민의 흔적들로 덮어가고 있다. 사무실에는 어느 한 곳 남편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사업자등록증을 찾기 위해 연 책상 옆 서랍에서 발견한 통장도 그중 하나였다.


더럽게 일이 안 풀리던 지난 3년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지 않을 만큼 벌게 해 주셨다. 참 신기하게도 힘든 와중에도 필요한 만큼은 벌었다. 벌이 중 하나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 꾸준히 대학 강의를 나가는 거였다. 지방 대학이라 맨날 왔다 갔다 하는 차비와 체력 소모를 생각하면 안 했으며 좋겠다고 매번 투덜거렸는데... 남편에겐 그게 한줄기의 희망이었으리란 생각을 하니 지금은 참 미안하고 고맙다.


자식과 가족을위해 부족함 없이 채워주고 싶은건 아마 세상의 모든 가장들의 마음이지 않을까?

통장 뒷면 남편의 글에서 간절함과 미안함, 감사함 이 모든 것들이 느껴진다...

다시 일어서 걸어가리라는 확고함도.


힘든 고민의 시간을 잘 견뎌낸 남편은 요즘 일이 넘쳐난다. 본인 사업을 운영하며 선배 회사에서 교육사업을 도맡아 이끌고 있다.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고 저녁에는 학원 강의에 본인 회사에 들어온 일들을 처리하고서야 진짜 퇴근을 해 집에 온다. 주말에는 행사일로 바쁜 나쁜 아빠지만 난 그것마저 감사하고 행복하다!


가장이란 무거운 이름에 짓눌려 주저앉지 않고 고뇌의 시간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남편을 보며 내 어깨를 swag 있게 털어본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하며.


나도 지금 남편이 그랬듯 책상 앞에 앉아 혼자 고뇌하며 미래를 그려 나가고 있다. 남편만큼 가장이란 무게의 짐이 내 어깨에는 없지만 고생해준 남편을 생각하며 나도 나 스스로 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애교가 없는 나지만, 오늘만큼은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꼭 이야기해줘야겠다.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 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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