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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 Valerie Mar 18. 2019

워킹맘의 1분 1초

워킹맘의 시계는 세상 사람들의 시계와는 다르게 움직인다.

'아... 씨,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한 것도 없는데...

한 시간 뒤면 출발해야 안 막히는데...'


아침 7시,

남편의 알람 소리로 어김없이 눈을 뜬다.


아직 젖을 떼지 않은 15개월 아들은 눈을 비비며 젖을 찾는다. 10분간 수유를 하다 보면 아들은 고새 잠들어 버리고 난 아주 살며시 아들이 깰라 숨죽이며 침대를 내려온다. 따뜻한 물을 끓이며 집에 있는 과일들을 대충 깎아 도시락통에 넣어 남편 아점을 챙겨준다. 지난밤에 어지럽혀 놓은 아들방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어제 미처 하지 못한 설거지를 하고 나면 8시.


나보다 치장 시간이 긴 남편이 그제야 화장실에서 나오면 10분 만에 머리 감고, 세수하고, 가글하고 렌즈를 낄 쯤이면 아들은 화장실 앞에 서서 가드를 잡고 구경하고 있다. 아들을 안고 냉동실에 얼려놓은 이유식을 꺼내 해동을 시키고 아기 물통을 씻어 오늘 먹을 일용한 보리차를 담아 놓는다.


이게 대충 우리 집의 아침 전경이다.


9시가 되면 어김없이 '띵띵띵띵'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나고 아이 돌봐주시는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 아들이 선생님에게 달려가 안기면 아침 2시간 내 할 일은 우선 일단락된다.


선생님께 특이사항을 전달하고 수다를 좀 떨다 차에 시동을 걸면 9시 반,

운이 좋으면 20분 만에 사무실에 도착하지만 월요일이나 날이 흐릴 때는 3,40분도 더 걸려 사무실에 도착한다.


1층 얼리버드 공짜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사무실에 올라오면 10시.

30분가량은 네이버 뉴스, 페이스북 뉴스피드, 신문사 홈페이지를 돌며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체크한다. 10시 반, 본격적인 업무는 시작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6시간 남짓.

이 시간에 화장실도 가야 되고, 점심도 먹어야 되고, 커피 리필하러 1층도 내려가야 되고, 식사 후 칫솔질도 해야 되고 업무 외에도 자잘하게 사용되는 시간들이 많다. 그런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방법은 "뛰어다니는 거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입주 공간 사무실을 사용 중이다. 3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서 일을 하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 내 책상에서 옆 책상에 서류 하나 가지러 가는데도 뛰어 움직인다. 프린터 하러 잠시 몇 발자국 사무실을 나설 때도, 지척에 있는 같은 층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갈 때도 무조건 경보를 해서 간다.


입주기업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주방에 커피머신을 사용하러 3번 정도는 내려가는데,

머그잔을 들고 내려가며 난 속으로 기도한다.


'오늘만큼은 시간이 정말 없으니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매일은 아니고 유독 서류 마감일이나 일이 많은 날 그렇단 걸 소심하게 밝힌다......이 글을 보는 동료들이 오해 없기를 바라며.ㅎㅎㅎ)


아무도 안 마주쳤다고 안전한 건 아니다. 커피 내리는 동안 누군가 들어올 수 있기에..


'이놈의 원두는 왜 이리 오래 갈리는 거야!'


애꿎은 커피 머신을 탓하며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행여 누구라도 마주치면 인사하고 근황 토크에 수다라도 떨어야 되는데 나에겐 그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날이 많다.






어릴 적부터 벼락치기의 달인이었다. 석사까지 공부를 했는데도 계획적으로 공부를 하거나 논문을 쓰지 않았다. 뉴욕에서 스타트업 창업가들 인터뷰 기사를 썼던 3년간도 기사 마감일 전날 벼락치기로 기사를 써냈지만 3년간 단 한 번도 펑크 내 본 적이 없다.


나에겐 항상 '밤을 새울 수 있는 체력'이 허락됐고, 몰아서 해도 충분히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능력? 과 결과물을 냈던 전적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게 시간은 많았고 그 시간을 내 편의대로 배치해 사용해도 별 탈이 없었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말이다.


출산을 한 후, 어떤 것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없었다. 처음 겪어 보는 이 상황, 참 불편했고 당황스러웠다.


인간의 존엄성마저 흐트러뜨리는 엄마의 삶.

가장 기본적인 밥 먹는 시간도, 화장실을 가는 시간도, 잠을 청하는 시간도 다 내 뜻에 의해 진행되지 않는다. 아기가 허락해줘야만 가능하다.


친정 엄마는 출산 전 남산만 하게 나온 내 배를 보며 틈만 나면 안타까운 눈빛을 날리며 습관처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에효, 너 이제 좋은 날은 다 갔어. 난 말이야. 아기 낳고 잠 한번 푹 자보는 게 소원이었어. 너 이제 잘 수 있을 때 많이 자둬. 이제 잠은 다 잤으니."


'아니, 세상에 잠을 왜 못 자? 당연히 애도 밤에는 자는 거 아냐? 난 야행성이라 밤에 잠 조금 못 잔다해도 별 상관은 없어..'


라며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그 당시에는 이해 가지 않는 엄마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랬던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밤에 최소 한두 번은 깨 제대로 잠을 못 잔 상태다. 이젠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는 게 정상이 돼 버렸을 정도다.


1년간 아이를 키우며 딱 하루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에 눈을 뜬 적이 있다. 기분 좋게 일어났는데 불현듯 아기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손가락을 코 밑에 갖다 댔는데도 모르겠어 미친듯이 흔들어 깨운 적이 있다. 그날은 아기가 감기약을 먹고 잔 날이었다.....




3평도 안 되는 사무실에서 뛰어다니는 내 모습이 웃기면서도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가 있다.


기회비용으로 따진다면,

내가 일을 함으로써 잃게 되는 건,

아기와 보내는 소중한 시간이고,

얻게 되는 건 내 일을 한다는 만족이다.


지금 난 소중한 것을 잃고 있기에 그에 합당한 결과물을 내야 하고 그런 결과물을 내기 위해선 내게 주어진 1분 1초도 허투루 사용할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어느 누구도 내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난 나도 모르는 사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시간의 소중함과 계획의 중요성을 느낀다. 시간을 아껴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계획이 없으면 집은 엉망이 되기 일쑤다.


이유식이 냉장고에 얼마나 남았는지, 깨끗한 내복이 충분히 옷장에 있는지, 기저귀는, 책은, 장난감은 개월 수에 맞게 준비돼 있는지, 오늘은 조금 더 일찍 퇴근해 장을 봐야 되는지, 빨래는 얼마나 밀렸는지 등 미리미리 체크 후 계획을 세워 움직여야 한다. 주말에는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어딜 가야 되는지 목적지를 정하고 실행에 옮겨야 주중에 못 누린 아이와의 퀄리티 타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이젠 선생님을 엄마 아빠 다음으로 좋아하는 아이지만, 엄마가 나갈 채비를 하고 문을 나설 때면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하기 힘든 날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은 한동안 내 가슴을 애리게 만든다.

 

그런 눈빛을 뒤로하고 세상에 나오는 워킹맘의 삶은 정직 해 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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