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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투더 폴리틱 Feb 25. 2022

중국 공산당의 분절된 권위주의의 함의는 무엇인가?

1. 중국 공산당은 국가와 사회에 대해 강력한 영도력과 달리, 당 내부는 각 파벌들이 정책의 노선을 두고 정치적 파벌을 이루는 ‘높은 당내 민주주의’를 보이며,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는 한 독재자에 의해 당의 권력이 획일화된 순수한 전체주의 체제가 아닌, 분절된 권위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공산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주요 지도자 간의 노선 투쟁의 흔적들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중국 공산당 내부의 분절된 권력의 성격은 강력한 1인 독재를 형성했다고 주장되는 마오쩌둥의 시기에도 존재했으며, 마오쩌둥의 서거이후 좌파 세력과 개혁파 세력이 강력하게 대립했던 덩샤오핑의 시기에 두드러지게 포착됨을 살펴볼 수 있다. 


2. 마오시기의 분절된 권위주의의 함의와 한계

 절대권력을 향유했다고 평가받는 마오쩌둥의 시기에도, 마오쩌둥이 지속적으로 당권을 유지하고 국정운영의 통제를 지속하기 위해서, 당내 혁명동지들과 관료들을 설득해 나아가야 했던 지점은, 중국이 결코 마오쩌둥 1인의 전체주의 국가의 속성보다는, 국가주석이라는 지도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단지도체제’임을 드러낸다. 경제발전의 노선을 두고 일어난 마오의 세력과 류샤오칭 및 덩샤오핑 개혁파 간의 투쟁은, 마오의 통치 시간 내내 공산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며, 마오는 자신의 당권이 흔들릴때마다 강력한 반우파투쟁을 통해 당권을 회복하는 주기성을 드러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대약진 운동 이후 노산회의 마오의 실정을 비판했던 펑더화이의 발언, 그리고 이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당내 실권파로의 등극을 통한, 선 경공업 후 중공업 발전 노선의 추진들이 당시의 분절된 권위주의적 속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당시 분절된 권위주의적 속성의 한계는, 사회의 기존적인 법치주의와 정치의 제도화가 이뤄지지 않은 시점에 있어 분절된 권위주의적 성격이 1) 군사를 동원한 정치적 불안정성 야기 가능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 한계가 존재한다. 마오쩌둥이 초대 국가주석으로 지니고 있었던 ‘1인 독재자 혹은 황제’로서 전제군주제적 국정운영의 한계로 인해, 분권절 권위주의는 집단지도체제를 와해시키며, 계급투쟁에 맹목적으로 정치적 역량을 투사하는 전체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을 드러낸다. 1인이 지나치게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고, 또한 군사력에 대한 통수권을 지니고 있을 때, 올바른 개혁 정책들이 강력하게 후퇴하고 폐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오의 시기 분절된 귄위주의가 위기를 맞아던 순간들은 다음과 같이 관찰된다. (1) 마오쩌둥의 시기 문화대혁명 기간과 (2) 마오쩌둥 통치의 마지막 10년 기간 동안의 문혁세력의 국내적 정치투쟁의 사례, (3) 마오 서거 이후 화궈펑, 4인방, 덩샤오핑 간의 권력투쟁의 지점들은 분절된 권위주의가 드러낼 수 있는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점들이다. 무엇보다, (1) 마오쩌둥의 시기 문화대혁명 기간은 중국 공산당 간의 내전이라고 해석될 만큼, 린뱌오와 마오쩌둥 중심의 군사세력이 민간에 대한 폭력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확산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중국 정치의 안정성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또한 린뱌오의 의문의 죽음은, 마오의 정치폭력에 의거한 정치인간의 암살과 암투의 가능성도 던져주기에, 분절된 권위주의가 내포한 비합법적이며 비제도적인 지점들을 환기시킨다. (2) 마오쩌둥 통치의 마지막 10년 기간 동안의 문혁세력의 국내적 정치투쟁의 사례는, 문혁소조 4인방의 폭거와 개혁파에 대한 일방적인 탄압이 이뤄져, 분절된 권위주의의 균형이 무너진 사례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리고 (3) 마오 서거 이후 화궈펑, 4인방, 덩샤오핑 간의 권력투쟁의 지점들은, 분절된 권위주의 체제가 권력승계의 지점에 있어서 중국 정치의 높은 불안정성을 가져오는 폐단이 존재함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화궈펑이 중국의 정치적 안정과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4인방을 법적 심판대에 올리고, 덩샤오핑을 복권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은, 중국 공산당 내부의 분절된 권위주의가 재작동하며, 집단지도체제를 회복해 나아가는 지점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결국 문혁은 분절된 권위주의 체제를 파괴함으로써 전개되었고, 그로인해 4인방은 폭거를 실시했지만, 마오 서거 이후 회복된 분절된 권위주의 체제의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이 4인방이라는 문혁의 잔재를 제거하고, 다시 공산당 내부의 건전한 보수파와 개혁파의 제도권 내부의 싸움으로 이러졌음을 살펴볼 수 있다.


분절된 권위주의를 이야기할 때는, 좌파가 내려오고 개혁파가 올라오는 현상,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좌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공산당 내부에서 개혁파와 정치적 대화/대립/설득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공산당 내부의 정치인들, 노선들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선거제, 다당제, 국유기업 소멸해 완전한 시장자유주의로의 행, 이에 따른 강력한 정치개혁의 추진 이야기까지 후바오방과 자오쯔양이 주장하게 된다. 이후 좌파, 개혁파, 급진개혁파의 통합이 이뤄지지 못해 천안문 사건으로 이어지고, 현재도 공산당 내부의 지도자들이 통일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3. 덩샤오핑 시기의 분절된 권위주의 함의와 한계


1) 덩샤오핑 시기의 분절된 권위주의의 함의

 덩샤오핑 시기의 분절된 권위주의의 함의는, 격렬한 노선 투쟁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당내 파벌 경쟁을 할 수 있는 도구로서 분절권 권위주의의 선기능을 드러낸다는 지점에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통치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균형을 통한, 당내 균형점의 모색하고자 했다.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서 중국식 사회주의의 생존은, 개혁개방의 지속적인 추진에 있다고 말했을 만큼 개혁개방의 강력한 추진을 위해 당내의 개혁파의 생존이 중대차한 문제로 존재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이 가져올 수 있는 정치체제의 불안정성을 완화하기 위해, 보수파 역시도 필요로 했다. 이와 같은, 중국 내부의 공산당 영도력의 견지를 위한 보수파의 필요성과 경제발전을 위한 개혁개방을 지속하기 위한 개혁파의 필요성 양자를 추구하기 위해, 덩샤오핑은 공산당의 분절된 권위주의의 성격과 집단지도체제 내에서의 합법적인 정책과정과 결정의 노선을 도모하도록 노력했다. 

 무엇보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노선을 견지하기 위해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과 같은 개혁파 정치인들을 국가주석과 당주석 자리에 앉히며, 큰 방향성에서의 개혁개방을 추진하고자 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덩샤오핑은 물론 후야오방이 학생운동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자오쯔양이 천안문 사태에서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자, 두 지도자를 하야시켰지만, 이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불러올 수 있는 불가피한 정치적 불안정성이라는 대가를 어느정도 취하더라도, 개혁파가 당내 가져올 수 있는 개혁개방의 효과성만은 취하고 그들을 당권에서 퇴출시키는 주기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덩샤오핑의 균형적인 시각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지점은, 지도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국정운영의 난국을 타개하는 스타일이며, 이는 곧 덩샤오핑이 지닌 마오쩌둥과 서로 다른 문제해결의 방식을 드러냈음을 보여준다. 마오쩌둥의 기존 정치체제와 행정기구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개혁 혹은 혁명의 추구보다도, 공산당 체제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도구의 틀 내부에서 지속적인 체제개혁을 이뤄나아갔던 덩샤오핑의 체제 지향적 리더십은, 중국 공산당의 분절된 권위주의가 평화적인 개혁 노선 견지의 가능성을 드러냈다는 지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향후 중국 지도자들에게도, 제 아무리 당내의 파벌 분쟁과 권력 분쟁이 격화되더라도, 중국 공산당 체제라는 공동의 토대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이는 분명,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기, 국가의 체제와 제도 전반이 파괴되었던 비극에 대한 반면교사였을 것이며, 보다 중국 정치가 체제 내부의 도구들을 활용한 법치주의적인 통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된다. 


2) 덩샤오핑 시기의 분절된 권위주의의 한계

 덩샤오핑의 균형적인 분절된 권위주의의 유지와 집단지도체제의 확립노력에도 불구하고,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추진하며, 당시의 중앙군위 제1부주석 양상쿤과 동행했다는 사실은 분절된 권위주의가 안고 있는 불안정성을 드러낸다는 지점에서 살펴볼 가치가 존재한다. 덩샤오핑이 천안문 사태 이후 개혁개방에 대한 과거 마오 시기 혹은 보수파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 군사적 관계를 동원해 공산당 지도부를 압박했다는 것이기에, 이와 같은 군사력을 활용한 폭력과 위협의 정치가, 당 내의 민주적 토론과 합의를 지속시켜 줄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한다. 

 이처럼 당-국가 조직에 대한 수반의 위치와 ‘군통수권’에 대한 수반의 위치가 지속적으로 불일치하며, 당-국가체제의 불안정성을 가져오는 지점은 중국의 분절된 권위주의 체제가 지니고 있는 폐단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2000년대 이후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장쩌민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자리를 후잔타오 1기 정권동안 포기하지 않았던 사례는, 극단적인 군사력을 동반한 반 당권파 운동으로 확산되지는 않았으나 지속적으로 중국의 권력 승계의 시기 정치적 불안정성을 가져올 수 있는 지점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4. 오늘날 중국의 현대정치 속 분절된 권위주의의 의미.

 오늘날까지 분절된 권위주의는 군사쿠데타와 같은 체제 번복의 위협을 비교적 안정적 억누르고 또 민주집중제에 의거한 당내의 협의적임과 동시에 민주적 틀 내에서 효율적으로 운영되어 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중국의 분절된 권위주의가 순수하게 공산당원들의 선의에 의해서 혹은 강력한 법규가 아니라 상호간에 공유하는 강력한 규범에만 의거해서 시행된다면, 이후 군사쿠데타 혹은 파벌 투쟁의 심화로 인한 공산당의 정치적 기능의 마비를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점에서 중요한 문제점이 존재한다.

 “군대의 통수권이 황제에 귀속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중국에서는 중공 주석이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통상 군사위원회의 주석이기도 했다. 군사위원회 아래에는 각기 군대를 통제하고, 군대내의 정치기구를 지휘하고, 행정 및 군수기능을 담당하는 기본 지휘체계가 있다.” <신중국사, pg, 459>에서의 주장처럼, 오늘날 중국의 분절된 권위주의 체제에 주어진 과제는, 중국이 정치화된 군사영역을 어떻게 국내 정치의 도구로서 활용되는 지점을 차단할 수 있는가로 정리가 된다. 마오쩌둥 시기를 지나, 덩샤오핑 시기로 접어들면서, 비교적 군사조직이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정도를 약화될 수 있지만, 군사조직이 통수권자 혹은 국가주석의 자의적인 판단 아래에서, 국내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위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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