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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Jul 05. 2022

으아아

타령 혹은 비명







     아버지는 혼잣말을 자주 했다. 말이라기보다 그냥 소리에 가까웠다. 앉았다 일어날 때, 무얼 하던 도중에, 혹은 그냥 가만히 있을 때에도 그는 나직이 으아아 소리를 내며 정적을 깨곤 했다. 어린 나는 마치 그 소리에 대답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을 느껴서 아버지의 타령이 늘 불편했다. 혼자 있을 때 웃지도 않았고, 말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던 내게 별다른 목적 없이 사람이 소리를 내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때문에 아버지가 으아아라고 할 때마다 나는 무슨 일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으며 끝내 적당한 반응을 찾지 못하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던 것이다.


     자취 생활 7년 차에 접어들며 내게도 비슷한 습관이 생겼다. 이를 닦다가, 세수를 하다가, 냉장고를 열거나 과제를 하다가도 흐어아 혹은 으아아 하는 곡소리가 난다. 처음에는 아무런 응답 없이 증발하는 내 목소리가 낯설어서 싫었다. 그런데 익숙해지니 이제는 밖이든 안이든 시도 때도 없이 으아아 소리를 낸다. 가끔은 으아아...인생... 하며 단어도 붙인다. 최근에는 어색한 사람과 길을 걷다 나도 모르게 "으아아 인생,,."이라고 말했다가 머쓱해진 적도 있다. 나이가 들면 타령이 는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나도 이제 어른이 되는 건가? 그런데 어른들은 왜 타령을 할까. 지금도 나는 누군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닌지 뜬금없이 궁금해진다. 으아아가 아니더라도 어른들은 앉았다 일어날 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낸다. 그게 으아아든 아이고든, 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인 습관이 생긴다는 점은 흥미롭다. 사람은 왜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내게 되는 걸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민음사, 2012)에는 ‘소리’와 관련된 짧은 일화가 나온다. 주인공 장 마르크가 권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인데, 그는 병상에 누워 죽어가던 한 노인을 회상한다. 노인은 침대에 누운 채로 계속해서 “아아아”라고 하며 시간을 보냈다. 노인의 ‘아아아’는 결코 무의미한 소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인이 시간을 대면하는 방법이었다. 장 마르크는 노인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시간을 대면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그 대면의 이름은 바로 ‘권태’라고 말한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고, 하릴없이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끊임없이 아아아라고 외치며 삶의 불가항력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그저 고독을 달래기 위해 혼잣말을 한다고 한다. 혹은 지겨워서일 수도 있겠다. 어릴 때는 심심할 새 없이 매일매일이 즐겁고 새롭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지겨운 하루하루로 변모하고, 사람들은 점차 삶을 살지 못하고 살아내게 된다. 언젠가 TV에서 “어이구 지겨워” 하면서 집안일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보고 내가 느낀 것은 매너리즘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조용한 발악이었다.


     누군가에게 혼잣말은 고요를 우는 방법이고, 누군가에게는 권태롭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방법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게 비명처럼 들린다. 내가 아아아 소리를  때는 답답한 마음에 일을 멈추고 싶은데 그럴  없을 때다. 짜증 나고 우울한데 설거지는 해야겠고, 과제도 해야 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삶을 영위해야  , 어디다 대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억울함이 북받쳐 오르면 내게서는 구멍 뚫린 풍선처럼 아아아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로써 어떤 정신적 내출혈을 막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철부지 막내이다. 수백  아아아 외쳐보아도  마음을 당최 헤아릴  없다. 그러나 불편했던 감정은 때때로 떠오른다. 아버지의 으아아 소리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것이 내가 처음 마주한 인간의 불안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의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어서, 이해시키기도 어려워서 서글펐던 누군가의 속사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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