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사람이 좋다. 숨기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담백하게 마음을 담아 말하는 사람. 심리 싸움 필요 없이 원활하게 소통이 가능한 사람.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자신에게 더 솔직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직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거나, 최소한 확신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좀처럼 내게 확신하지 못하기에 매 순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무슨 말을 뱉고 나면 그게 맞나?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하는 의심이 잔상처럼 뒤따른다. '사실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를 입에 달고 살면서 그다음 말이 사실인지 진심인지는 사실 나도 모른다. 그나마 확실하다고 믿었던 내 성격이나 특징도 시간이 지나면 변할지 모르겠다. 그럼 내가 나에 대해 했던 모든 말들은 거짓말로 남게 되겠지.
언젠가 <거짓말의 발명>(2009)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사실만을 곧이곧대로 말하면서 살아간다. 마음에 안 드는 직장 동료에게 “너를 곧 해고할 거야”라고 말한다던가, 예정보다 일찍 데리러 온 데이트 상대에게 “마스터베이션 중이었는데 당신이 일찍 와서 못 끝냈잖아요”라며 짜증을 내는 웃긴 세상이다. 주인공은 이런 순진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다 하게 된 거짓말로 일확천금을 얻고, 애인에게 “당신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아름다워요”라는 말도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거듭난다.
영화를 보면서 저게 뭐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저 사실을 말한다고 솔직한 사람일까? 오늘 옷 입은 거 진짜 구리네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건 솔직한 사람이 아니라 무례한 사람이다.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게 솔직함은 아닌 거 같다. 그럼 무엇이 솔직한 걸까. 그러려면 거짓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동시에 진실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은 진실에 가장 가까운 말을 하는 사람일 테니까.
그런데 이 진실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나마 가장 진실에 가깝게 설명할 수 있는 게 ‘나’일 텐데, 나를 소개할 때도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때그때 두드러지는 부분을 대표로 내보일 때가 많다. 때로는 욕망이 개입한다. 이런 삶을 살아가고 싶어. 이렇게 보였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이렇게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들이 연이어 호소한다. 유머러스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을 때는 나는 농담하는 걸 좋아해.라고 말하고, 자기 검열의 늪에 빠져있을 때는 나는 현실을 직시하는 게 싫어서 유머로 상황을 넘기려고 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자는 여유롭고 유머러스한 사람, 후자는 피곤하고 슬픈 사람. 둘 다 나에 대해 이야기한 건데 둘 중 무엇이 진실일까? 무엇 하나가 더 진실에 가깝다면 하나는 거짓말일까? 아니면 둘 다?
여기까지 써놓고 친구와 잠깐 수다를 떨었다. 창작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나는 언어 예술이 음악보다 명료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언어에 더 매력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런데 언어로 뭔가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나? 세상에 명료한 게 존재하나?” 세상은 혼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언어가 세상을 명확하게 반영할 수 없고, 비교적 명확해 보이는 헤밍웨이의 소설 같은 작품도 결국 그렇다는 착각을 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 세상에 명료한 건 없어. 잠깐 명료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있을 뿐이지.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계속 그 착각을 찾아다니는 거지.”
그의 말을 번역하자면, 창작에는 무형의 무엇을 명료하게 밝히고자 하는 욕망이 반영된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창작은 어느 무엇도 명료하게 밝혀낼 수 없다. 그럼에도 예술가는 그가 바라는 무언가에 닿기 위해, 혹은 밝혀내기 위해 분투한다. 이것은 영원히 거짓일 수밖에 없는 거짓말의 운명과도 닮았다. 거짓말은 진실이 되기를 바라지만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거짓말은 가고 싶은 곳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정체된 세계에 갇혔다. 그리고 이 정체된 이미지에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끝내 닿을 수 없는 곳을 바라만 봐야 하는 마음. 그 마음이 너무도 절박해서 거짓말이 일종의 기도처럼 들린다. 제가 안 그랬어요. 전 그런 사람 아니에요. 괜찮아요. 더 나아질 거예요. 견딜 만해. 등등.
거짓말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만 비참해지는 이유는 왜일까? 이따금씩 나를 사로잡는 답답한 감정은 무지에서 오는 걸까 결핍에서 오는 걸까? 나는 왜 자꾸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바랄까. 별것아닌 것들에 자신을 투영하고 슬퍼하는 변태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해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결론을 내고 싶어 하는, 그속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성급하고 모난 마음이 무뎌지려면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할까.
나는 생각했다. 거짓말은 진실이 될 수 없다. 그래도 거짓말은 누군가를 속일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정체된 세계에 갇혀있음에도, 우리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착각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진실이 될 수 없지만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 우리를 또 다른 진실로 이끌 것이다. 잊힐 거야. 되뇌면서 어느새 사라진 기억처럼, 괜찮다 달래며 단단해진 마음처럼. 그렇다면 거짓말에 운명도 깜빡 속을 수 있지 않을까. 거짓말을 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다 보면, 계속 도망치다 보면 마침내 모두를 속이고, 운명마저 속이고 허락되지 않았던 어떤 곳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거짓말이 마침내 진실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정말 솔직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