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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Sep 30. 2022

침묵으로 번지!

농담과 침묵이 관한 글








    '요즘 당신을 웃게 하는 게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실없는 농담'이라고 답했다. 목적이 불분명한 만남과, 간명한 표현을 위해 고민을 거듭하지 않아도 되는 대화가 좋다. 그냥 진지한 모든 게 싫은 걸 수도 있다. 영화관에서는 꼭 막대한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를 골라 본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가능해지는 세계에 열광한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진지하지 않아 보이는데 사실 진지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농담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진지하다. 상황에 맞는 농담을 잘하려면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완벽한 농담은 그저 개소리가 아니라, 진지하고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돼준다. 그러니 질문에 다시 대답하자면, '진지한 사람이 하는 실없는 농담이 나를 웃게 한다'가 되겠다. 그런 사람이 하는 농담에는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담겨 있다. 한마디로 웃프다.


    농담은 웃프다. 해학적이다. 농담은 내가 우울 속에 침잠하지 않도록 잡아준다. 블루스를 제일 좋아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선율의 향연과 같은 재즈와 달리 블루스는 소음의 향연에 가깝다. 12마디의 단순한 블루스 코드 진행 안에서, 연주자는 의미가 확실한 노트를 사용하여 똑똑하게 연주할 수도 있지만, 원한다면 정신을 놓고 마음껏 울부짖어도 된다. 그런데 이 울부짖음이 블루스 안에서는 신파스럽지 않고 익살맞게 재해석 된다.

    스캇 헨더슨Scott Henderson의 <I Hate You>라는 곡에는 웃픈 감정이 잘 드러난다. 가사와 연주, 이팩팅까지 다 완벽해서 블루스 곡을 추천할 때 항상 포함시키는 곡이다. 6/8박자 스타카토 리듬으로 장난스럽게 시작하는 이 노래의 주제는 연인의 싸움인데, "넌 루저야"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술이나 끊어" "너 다리털 밀면 끊을게"와 같은 거친 말들이 오가다가 나중에는 엄마 욕까지 하면서 파국에 치닫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노래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스캇 헨더슨의 기타 솔로 때문이다. 1:45초쯤에 귀를 찢을 듯이 등장하는 기타 솔로 구간은 화자의 고조된 마음이 최대로 표출되는 부분인데, 캐릭터 노트로 적절히 코드를 이끌어 가다가 마이너 스케일을 절묘하게 사용해서 다음 턴으로 돌아가는 방식이 너무도 전략적이고 적절하다. 완벽하게 훈련된 수영 선수가 레일 끝에서 매끄럽게 몸을 돌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감정 표현 또한 놓치지 않는다. 기타 암을 활용한 강렬한 비브라토는 '악! 그러니까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하는 화자의 마음을 감정째로 꺼내다 놓은 것 같다. 기타에 적용된 딜레이 이팩터도 주목할 만하다. 굉장히 느린 타임으로 세팅되었는데, 자칫 '딜레이 잘못 건 거 같다' 싶을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지는 이팩팅인데도 아슬아슬하고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그의 기타 솔로는 마치 고든 램지가 잘 안 쓰는 재료로 만들어낸 환상의 스테이크 같다. 덕분에 시종일관 저주를 퍼붓는 가사가 그를 감싸는 경쾌한 리듬과 안정적인 편곡으로 인해 다분히 해학적인 분위기로 연출된다. 거지 같은 감정을 수려한 해석 방식으로 '아닌 척' 만들어 내는 것, 내가 생각하는 유머와 해학의 이미지와 닮았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농담은 '울음을 잘 아는 웃음'이다. 혹은 '웃음인 척하는 울음'이다. 벗어나고픈 현실을 깊게 이해하고 적절히 숨구멍을 내어주는 따듯한 배려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농담꾼은 무책임하고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고보면 농담은 언제든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다. 진지하게 미친 소리를 하면 정말 진지하게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히지만, 장난으로 미친 소리를 하면 실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농담하는 사람은  책임을 피할 수 있다. 언제나 정확히 말하는 법 없이 스리슬쩍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침묵의 세계』(2019, 까치)에서는 말과 침묵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막스 피카르트는 이 책에서 침묵의 경이에 관해 이야기하며 말의 경솔함을 비판한다. 그는 말이 온전한 침묵에서 기인하지 않을 때 그것이 소음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침묵이란 무엇일까? 사물이나 인간, 혹은 인상이나 생각이 언어나 다른 무언가로 발현되기 전의, 순수한 상태이다. 오늘날 말들은 침묵에서 말로 나아가는 게 아니고 말에서 말로, 소음에서 소음으로 옮겨 다니고 있다고 그는 탄식한다. 수면 아래 침묵에 닿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망령처럼 맴도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는 게 완전한 상태일까? 그러나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진리란 언어를 통해 발견되는 것이며, 침묵은 말로 인해 비로소 진리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연의 모습에서 파생되는 '침묵의 말'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아마 저자도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침묵에 관한 책을 집필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암묵적으로 약속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말이 꼭 침묵에서 비롯되어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말은 반드시 침묵에서 말로, 말에서 침묵으로 이어져야 할까? 말이 그저 소음이면 왜 안 될까? 침묵이나 진리를 향해 수직으로 뻗어가는 고뇌의 잠수도 필요하지만 그 표면을 빠르게 넘어 다니는, 수평적인 농담의 서핑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물론 보다 멋스러운 농담은 침묵을 아는 농담일 것이다. '알아. 아는데 잠깐 넘어가자고요!' 하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치는 것은 다를 테니 말이다.


    나는 이따금씩 '침묵을 아는 프로 농담러'를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진지한데 안 진지한 척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피카르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 농담의 9할 이상이 헛소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건 더 최악이다. 그럼 나는 진지하게 개소리하는 사람도 아니고, 개소리를 안 하는 사람도 아니고, 개소리를 안 하는 척하는데 개소리를 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피카르트처럼 침묵에 대해 열심히 고찰하면 될까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안 되겠다. 변명하자면 시간이 없다. 온전한 침묵을 찾기에는 삶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다. 내가 멈추어 한 곳으로 깊게 빠져들더라도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사회적 맥락이나 상황에 따라 그 침묵은 침묵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체력의 한계도 큰 이유다. 매 순간을 골몰하며 살다가는 중요한 때에 쓸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침묵 속에서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핑계에서 핑계로 이어지는 문장을 남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더 깊은 곳 아래에서 침묵에서 침묵으로 이어지는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말에서 말로 흘러가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내 말들은 때때로 내면에서 분출되지 않고 이 말의 꼬리에서 시작해서 저 말의 입과 연결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실마리를 타고 나의 침묵에 닿아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생각했다. 둘 다 하는 것은 어떨까. 적당히 농담과 무용함의 서핑을 즐기다 가끔씩 침묵의 수면 아래로 잠수하는 것이다. 실없는 농담과 끝없는 침묵 사이를 열심히 오가는 도중에 만나는 풍경은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하나의 인생에서는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나는 농담과 침묵 사이를 열심히 오가기를 원한다. 그 부지런한 움직임 사이 어딘가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무엇, 무엇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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