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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8살 꼬마 머슴

 1991년 꽃 샘 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전화가 울렸다.
 
 “너희 아버지, 사고 났다. 빨리 엄마 공장에 가서 삼촌한테 전화하라고 해라!”
쿵! 하는 심장 소리와 떨리는 목소리, ‘뛰어야 해, 뛰어야 해!’하는 내 속에 소리가 뒤섞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앉아서 뛰었다. 마음이 먼저 앞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내가 앉아서도 뛰는 습관이 생긴 것이. 지금의 나는 중요하지 않았다. 앞만 봤으니까. 내일만 생각하느라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
 
 내 나이 13살,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 그날 이후로 나는 혼자 생활해야 했다.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 곁을 어머니가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형제자매가 없었기 때문에 오롯이 혼자 먹고 자고 학교에 가야 했다. 어찌나 외롭던지 두렵기까지 했다.
 
 동네 어른께서 자주 와서 챙겨주고 친구들이 가끔 함께 있어주었기 때문에 외롭고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혼자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때로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니는! 아빠한테 오지도 않고! 불효 막심한 것 같으니라고! 병원에 가서 내 물건 가지고 와!”
긴 병원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평소 나에게 화를 내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에 무척이나 큰 충격이었다. 병원이 멀어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같이 화를 내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어붙어 버렸다.
 
 부모님은 가끔 다투셨지만 나에게는 한 결 같이 대해 주셨다. 특히 아버지는 나를 무척 아꼈기 때문에 어머니가 매질이라도 할라치면 불같이 역정을 내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나를 나무라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 부모님은 자주 싸우셨다. 싸웠다기보다는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술을 곁에 두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 한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를 괴롭히고 때리기도 했다. ‘아, 나는 왜 저런 분들 밑에서 태어났을까’하면서도 어머니가 다칠까 봐 온 마음을 다해 싸우는 소리에 집중했다. 힘들고 불안한 시간이었다.
 
 열아홉, 많지 않은 나이에 내가 나를 책임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정받고 약간의 자유를 얻은 것이 나는 좋았다. 경제적, 정신적 독립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부모에 대한 책임감을 보너스로 받은 셈이다.
 
 점점 몸이 작아지고 야위어 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원망과 분노가 색을 잃어갔다. 내가 나에게 주던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자신을 살리지 않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지만 아버지의 과거 삶을 듣게 된 24살 봄,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4년을 벌어 늦깎이 대학생이 된 나는 첫 과제로 부모님의 인생 보고서를 써야 했다. 아버지와 대화가 없었던 나는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 과제 제출 일을 3일 남겨 놓은 날, 변함없이 술을 드시고 계신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 어릴 때 어땠어요?”
오래 망설이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답하셨다.
 
“배우고 싶었지, 학교 가고 싶었다.”
아버지의 그 첫마디와 두 번째 말의 간격이 길어졌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왜 이런 삶을 살게 된 건지 알게 되었다.

 사별한 남자의 후실로 들어가 첫 아이를 낳은 어머니 밑에서 없이 사는 살림에 국민학교 1학년을 다니다 말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된 불쌍한 시골 소년, 그것이 어린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스물여섯, 힘든 군 생활 속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셨다는 아버지, 스물아홉 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중매로 결혼을 하고 두 명의 아이를 하늘로 보내 뒤, 8년 만에 얻는 딸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아버지께 내가 받은 유일한 유산은 절약정신과 돈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살면서 빚을 지는 것은 죽는 일과 같다고 믿으셨던 아버지는 평생 없이 사셨어도 남에게 돈을 빌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배운 것도 지원자도 없었던 아버지는 몸을 밑천 삼아 아내와 딸을 먹이고 입히셨다. 9시 이후 전기를 쓰는 일이 없었고 택시 한 번 타지 않으셨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아버지는 악착같이 아끼고 모으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가진 것도 물려받은 것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벌어 배우는 일이었다. 4년을 벌어 대학이라는 곳에 갔다. 악착같이 일하고 배웠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배우기를 4년, 그리고 다시 5년을 벌었다. 인생이 뒤집어지고 처음 한 일이 대학원 진학이었으니 내가 아버지께 받은 유산이 또 하나 있는 셈이다. 배움에 대한 열망. 어떻게 해서든 하나 있는 딸자식은 잘 가르치고자 했던 아버지의 소원을 내가 이루어 드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께 받은 유산과 내 속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대로 돈을 쓰면 죄책감이 밀려왔고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악착같이 살았다. 일을 하면서도 다음 일을 미리 생각하고 오늘을 살면서도 내일을 걱정했다. 뭔가를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했다. 뭐든지 해야만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는 없고 일만 있는 날이 쌓여갔다. 그리고 시간은 쉼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아버지 사고 이후, 2년 만에 어머니도 경제력을 상실하고 보상금을 까먹으며 생계를 유지할 때, 나는 내가 남들처럼 살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슬프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이분들을 책임져야 하겠구나 생각했다. 이른 나이에 경제력을 잃은 부모님을 내가 책임지려면 앉아서도 뛰어야겠구나 생각했다.
 
 일하면서 배우고 하루에 7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끼니를 거르는 날이 다반 수고 먹더라도 길거리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빨리 먹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니 서서 먹을 수 있는 어묵이나 빵으로 배를 채웠다.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일이어서 좋았다.
 
 더 잘하기 위해서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점점 더 사라지고 일만 남았다. 일을 많이 하는데도 불안했다. 더 해야 할 것 같고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앉아서도 뛰는 습관은 서른 해가 지나도록 고쳐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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