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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너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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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하비 Mar 19. 2020

만약에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들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꼭 일어나게 되어있다.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지난 1월 25일, 설 당일이었다. 차례를 지낸 후 성묘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가는 걸 눈치챈 아이가 킥보드를 타고 싶었는지, 킥보드가 실려있는 자동차 트렁크를 가리키며 어린장을 부렸다.

언제 어디서 차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도시에선 마음 놓고 타지도 못하는데... 비교적 차가 드문 시골이니 이럴 때라도 맘껏 태워주자 싶었다. 시댁에서 묘까지는 꽤 먼 거리였기에 가는 동안 킥보드를 타기로 했다.


서툰 발짓으로 열심히 바퀴를 굴려가며 묘에 도착해가던 , 나와 남편이 잠깐 한눈을  사이 킥보드를 타던 아이가 순식간에 앞으로 곤두박질치듯 넘어졌다. 순간 너무 놀랐지만 이런 상황에서 부모의 반응이 트라우마로 남을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며 빨리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서럽게 우는 아이를 달랬다. 다행히 남편이 아이를 빠르게 낚아챘고, 추운 날씨라 마스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처가 심하지 않은  같았다.  끝에 작은 상처가 생겼고, 아랫니 사이사이 피가 고였지만 금방 멎었다. 그때  입술 안쪽을  생각을 못했을까.


지치도록 울다 잠이 든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돌아와 턱에 난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두 시간 뒤 푹 자고 일어나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본 적 없던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입술을 뒤집어 자세히 보니 아랫입술 안쪽이 살이 뜯겨나간 것처럼 움푹 패여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른들께는 죄송했지만 바로 짐을 챙겨, 대구에서 소아응급실이 있는 병원 중 가장 가까운 파티마 병원으로 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되던 시기라 입구에선 마스크를 나눠주고 있었다. 접수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간호사로 보이는 분이 오셔서는, 입 속이라 소아과에서는 볼 수 없고 치과 응급실이 있는 경북대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시간이 자꾸 늦춰지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침착하려고 애를 쓰며 빨리 움직였다.


경대병원에는 더 많은 대기자가 있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대기 시간에 바이러스로 인한 불안감까지 더해져, 얼른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도 1시간 뒤 진료를 볼 수 있었고 진료실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해주시기 위해 직원분이 동행해주셨다. 나는 길을 정말 잘 못 외우는 편인데 그 날 담당과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 층수, 복도가 정확히 기억이 난다.


들어서자마자 수술대 같은 것이 보였고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상처를 보자마자 꿰매야 한다고 하시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도저히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복도로 나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선생님의 말소리가 끝나고 상처를 꿰매기 시작함과 동시에 울부짖는 아이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만약에 성묘를 가지 않았더라면, 킥보드를 태우지 않았다면... 5분이 5시간처럼 흘렀고 상처에는 세 바늘이 꿰매졌다.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죄책감에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 울지 마" 하는 아이에게 느꼈던 벅찬 감정, 흔들림 없이 나와 아이를 보살폈던 남편의 모습에서 느꼈던 것들. 넘어지기 전 마스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덜 다쳤고 이마나 코를 다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더 심하게 다치지 않은 게 얼마나 감사한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죄책감으로 끝날 게 아니라, 이 일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들을 잊지 말고 소중히 기억해야겠다고. 다시는 이보다 더 크거나 작은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또 생기게 된다면 조금은 더 성숙하게 대처하자 다짐했다.


일주일 뒤 실밥을 풀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아이들의 회복력이 빠르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나아버린 너.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 또 감사하며! 고마워,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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