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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 Apr 29. 2020

"내가 어디가 좋아서?",
영화 <내 사랑>

"너는 내가 어디가 좋아서 만나?"


우리는 종종 어려운 질문을 마주한다. '뭐라고 대답하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를 굴리게 된다. "응, 너는 눈이 예뻐." 대답을 들은 상대는 일단 칭찬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썩 만족스럽진 않은 모양이다. 다시 묻는다. "또? 또 어디가 좋아서 만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 질문은 결코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사랑을 갈구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사랑하는 이에게서 확인받고 싶은 것뿐이다. 연인 관계에 있어서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과정은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진지한 물음에 "응, 그냥 예뻐서, 잘생겨서"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은 상대를 섭섭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난감한 질문에 매력적인 정답을 내놓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착하니까", "귀여워서", "재밌어서"와 같은 단순한 대답 말고 다른 멋진 대답은 없을까. 영화 <내 사랑(Maudie, My love)>을 통해서 답을 찾아보자.


(주의: 본 게시글은 영화 <내 사랑(Maudie, My love)>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 영화 속 주인공의 실제 인물.


"너는 내가 어디가 좋아서 만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질문을 던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너를 좋아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이런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나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 거지?" 이런 궁금증은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을 포함하는 것이다. "너를 좋아해."의 '너'가 잘생긴 외모를 가진 '너'인지, 따뜻한 심성을 가진 '너'인지, 우리는 알고 싶어 할 수 있다. 섬세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영화 <내 사랑>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취향'이다. 나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통해 표현된다는 말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힙합을 좋아하는 것이, 국밥을 좋아하는 것이 곧 '나'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가 좋아서 만나?"에 대한 매력적인 정답은  "너는 ○○를 좋아하니까"라는 것이다. 영화 <내 사랑>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도 그녀의 취향에 대해 알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내 사랑>, 모드가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 줄거리부터 간략히 설명하겠다. 여자 주인공인 모드(샐리 호킨스)는 태어날 때부터 류머티즘 관절염과 장애를 앓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숙모의 집에 얹혀살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숙모와 잦은 다툼 끝에 집을 나온 그녀는 우연히 남자 주인공 에버렛(에단 호크)이 가게에 붙인 가정부 모집 공고를 보고는 그의 집에 찾아간다. 에버렛은 모드를 가정부로 받아들이지만 장애가 있는 그녀가 탐탁지 않다. 에버렛은 혼자 사는 데 익숙해져 독단적이고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있다. 모드는 그런 그에게 상처를 받지만 가정부로서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모드는 에버렛의 냉대에도 열심히 일을 하며, 집 안에서 벽에 그림을 그리며 위안을 얻는다. 그렇게 그 둘은 함께 생활해가다 서로에게 사랑에 빠진다.


영화에서 에버렛이 모드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그녀의 취미(취향)인 그림 그리기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모드에게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를 더 이상 가정부로 보지 않는다. 더 이상 모드에게 가사일을 강제로 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그림 그리기를 도와주기까지 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 장면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사랑하니까 당연히 잘해주는 거 아니야?" 생각했을 것이다.


<내 사랑>, 에버렛이 모드를 도와주는 모습.


하지만 그렇게만 본다면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된다. '표현에 서툰 남녀가 투닥거리다 결국 정이 든다. 남자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잘해준다.'는 뻔한 스토리가 된다. 영화 속 내용을 자세히 떠올려보라. 에버렛이 모드에게 사랑에 빠져서 그가 가사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에버렛이 우연한 계기로 모드의 가사를 도와주게 되면서, 그녀의 그림에 대해 눈을 뜨고 사랑에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에버렛은 우연한 계기로 그녀의 취향에 대해 알게 된다. 그녀의 취향에 대해 눈 뜨게 된 순간 에버렛은 그녀를 더 이상 가정부로 보지 않고 인간으로서 사랑하게 된다. 필자는 그것이 감독 에이슬링 월쉬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에버렛은 처음에 모드를 가정부로 고용해 줄곧 그녀를 하대한다. 집안에서의 모드의 신분이 자신이 키우는 개보다도 못하다는 심한 말까지 한다. 하지만 한 부유한 이웃이 모드에게 그림을 의뢰하면서 모드는 가정부의 일보다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의 관계는 주종관계였다. 모드의 그림을 파는 것은 곧 에버렛의 주머니를 채우는 일이었기 때문에, 에버렛은 그녀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준다. 그녀가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이 가사를 도맡아 하기도 한다. 에버릿에게 모드의 그림은 처음에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그는 모드의 가사를 도와준 것이다.


<내 사랑>, 에버렛이 모드에게 주종관계를 강조한다.

모드는 그림이 돈벌이가 되든 안 되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무척 즐긴다. 그 모습을 본 에버렛은 드디어 모드의 취향에 대해 눈 뜨게 된다. 그녀의 취향에 대해 알게 되자, 그녀 존재 가치를 가정부로서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유명한 철학자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해 깊이 탐구한 실존주의 철학자다. 그는 1943년에 발표한 <존재와 무>를 통해서, 인간은 아무런 목적이 없이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은 사물과 달리 목적이 없이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도구로 사용하는 사물은 본질이 존재에 우선한다. '펜'을 떠올려보자. 펜의 본질은 '글씨를 쓰기 위한 도구'이다. 펜이 글씨를 쓰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본질)을 잃어버리는 순간, 펜의 존재 가치는 상실된다. 즉, 사물은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쓰임새로서 가치를 잃는다 해도(아무 목적 없이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 없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창조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


영화 초반부에서 모드의 본질은 가정부였다. 에버렛에게 모드는 가정부로서 기능을 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모드의 취향에 대해 깨닫는 순간 더 이상 그녀의 존재 가치를 가정부에서 찾지 않는다. 모드의 취향에 대해 눈을 뜬 순간 그는 그녀의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를 확인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모드가 더 이상 가사일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주장한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의 의미다.


사르트르의 이 말은 굉장히 현대적인 개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간을 도구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떠올려보자. 나무꾼의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은 나무꾼일 때 존재 가치가 있었다. 본질이 존재에 앞섰던 시기였던 것이다. 신분제뿐만이 아니다. 과거에는 종교의 교리가 사람들의 의식을 강하게 지배했다. 지금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사람들의 의식주를 지배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태어나 그를 위한 삶을 사는 것만이 지고지순한 진리였다. 스스로를 신의 교리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분제는 사라졌고, 종교의 교리가 사람들의 생활상 전체를 지배하지 않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매일 직장에 출근해 일하다가 퇴근하기를 반복한다. 매일 일상에서 도구로서의 삶을 살다가 자유를 되찾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루 종일 회사의 구속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직장인들이 흔히 느끼는 공허함이다. 이 공허함을 달리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술을 진탕 마시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나가기도 한다.


<내 사랑>, 집안에는 모드가 그린 그림으로 가득하다.


사르트르가 주장한 "존재가 본질에 앞서는" 물질적인 환경이 조성됐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속에서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모드는 굉장히 자신의 존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주어진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창조했다. 그녀는 아무런 목적 없이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다. 


자유 속에서 느끼는 불안은 술을 마신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나간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인간은 혼자 왔다가 혼자 갈 수밖에 없는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느낄 때(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할 때) 해소될 수 있다. 인간은 도구로서의 삶을 살 때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는다. 술을 마시거나,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고 해서도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 <내 사랑>은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는 길이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방법이라고 답한다.


<내 사랑>


"너는 내가 어디가 좋아서 만나?" 이 질문은 난감하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다. 상대방이 언제 '살아 있음'을 느끼는지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취향'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이미 상대의 그 취향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어렵게 상대방의 장점을 찾으려고 고심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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