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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 Apr 29. 2020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박하사탕>

“아빠랑은 말이 안 통해.” “집안에서 자기가 왕인 줄 알아.” “여태까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으면서.”


작금의 대한민국에는 섭섭한 딸들이 많다. 요즘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딸들은 그럴 거라 생각한다.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주인공도 그런 전형적인 아버지다. 아니, 좀 심한 쪽이다. 제목은 ‘가부장적’이라 말 붙였지만, 영화 속 주인공 영호(설경구)는 ‘마초’에 가깝다.


폭력적인 아버지가 죽도록 미운가? 폭력적이진 않더라도 말이 안 통하는 아버지가 답답한가?


이 영화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서다. 아버지들도 각자의 속사정이 다 있을 거라는 얘기다.

영화 <박하사탕>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보자.


(주의: 본 게시글은 영화 <박하사탕>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하사탕>, "나 돌아갈래!"


<박하사탕>에 전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우리 사회가 만든 것이다.” 영화는 스토리 진행 내내 주인공 순수했던 영호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20년이 넘는 긴 시간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시대가 사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영화는 잘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 영호는 너무나도 전형적이고 시대적인 캐릭터라는 말이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물이 겪는 문제가 ‘나’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주인공 영호는 굉장히 폭력적이면서도 이기적이다. 아내가 바람을 폈다고 두들겨 패면서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바람을 피운다. 경찰 시절 가혹하게 고문했던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만나지만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모순투성이다. <박하사탕>은 영호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여준다. 영호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실은 영호 스스로가 왜 그렇게 모순적인 사람으로 변했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면서 영호의 인생사를 추적한다.


1999년. 영호는 20년 전 스무 살 적 만난 동우회가 모임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맘껏 즐기지 못하는 영호. 위험천만한 철길 위에 올라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소리친다. 영호는 사업도 망하고, 아내에게는 이혼당하고, 첫사랑 순임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상태다.

1994년. 사업은 잘 되지만 아내는 바람이 나고 영호도 상간녀와 몰래 만남을 갖는다.

1987년. 영호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청년들을 잡아들인다. 한 청년을 잡아들인 후 아무렇지 않게 잔혹한 고문을 하는 영호. 그의 생활에서 그 일 말고는 더 이상의 열정은 없어 보인다. 첫사랑 얘기만 공허하게 내뱉는다.

1984년. 이제 막 경찰이 된 영호는 선배 경찰들에게서 열심히 일을 배운다. 피의자를 잔혹하게 고문하고 선배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영호. 잔혹해진 자신의 모습에 자격지심을 가진 그는 자신을 찾아온 첫사랑 순임을 매몰차게 내보낸다.

1980년. 군인이 된 영호. 순임이 면회를 왔지만 만나지 못하고 작전에 차출된다.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실수로 한 소녀를 쏴 죽인다.

1979년. 스무 살 영호. 과거를 소리치는 그 자리에서 첫사랑 순임을 만난다.


<박하사탕>, 첫사랑 순임과 만나는 장면.


브론펜브레너라는 사람은 발달 심리학자다. 아동의 발달 과정을 주로 개인적 요소(개인의 기질, 부모와의 관계, 가정환경 등)에서 바라보았던 이전과는 달리, 그는 아동이 처한 사회적 환경까지 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발달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회 환경의 맥락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발달 심리학에서 사회 통합적인 시각으로의 큰 전환점이 된 ‘생태학적 체계이론’이다. 생태학적 체계이론은 아동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미시-중간-외적-거시 체계로 관점을 확장해나간다.


미시체계는 아동이 직접적으로 접하고 있는 영역이다. 즉 아이와 직접 상호작용하는 부모(가정)가 주를 이룬다. 중간체계는 미시체계의 요소들에 영향을 미치는 체계를 말한다. 예컨대, 친구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학교의 분위기, 또래 집단, 부모가 관계를 맺어나가는 직장 문화 등이 이에 해당된다. 외적체계는 미시체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서 지역 사회, 사회 인프라, 미디어 등을 말한다. 거시체계는 가장 넓은 체계인데, 비슷한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문화권, 법체계, 사회적 관습, 시간(시대)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브론펜브레너는 이 네 체계가 요소가 인간의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발달 심리학의 다른 부분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피아제는 전조작기(2~7세)의 사고 특징으로 자기중심적 사고를 설명한다. 이 시기의 아동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인해 이 시기에 가정의 불화를 겪은 아동들은 또래에 비해 굉장히 성숙하게 자라나는 경향이 있다. 가정 불화를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내가 잘못해서 그러는 거야. 나만 잘하면 부모님은 싸우지 않아.’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생태학적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비춰보면, 이때 아동의 심리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단순히 가정의 불화 그 자체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가정 불화의 원인이 사회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혹은 그 이전의 굵직한 사회적 사건들이 많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동안 그 충격들을 모두 개인이 스스로(주로 가족 단위에서) 감당하게끔 내버려졌다. 그 충격들을 감내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모가 다투거나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주인공 영호는 스무 살이 되고 나서 마흔 살이 되기까지 세 번의 큰 역사적 충격을 몸소 겪는다. 첫 번째 충격은 영호가 군대에서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다. 당시 영호는 민주화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차출된 상태였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난리를 치는 바람에 영호는 극도로 긴장을 하게 되고 다리에는 총을 맞는다. 그는 진압 작전 중 시내 철길 위에서 한 소녀를 만나는데,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던 중 실수로 그녀를 쏘게 된다. 두 번째 충격은 영호가 노동 운동을 하다가 그만두고 경찰이 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짧은 대사로 잠깐 동안만 나오는 부분이다.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생략한 듯한데, 아마 생계를 위해 경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충격은 경찰이 되고 나서 폭력적인 고문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 경찰이 된 영호는 선배들에게서 민주화운동으로 잡아들인 사람을 고문하는 일을 배운다. 그리고 잔혹하게 고문할수록 “잘했다.”는 칭찬을 듣는다. 이는 첫사랑을 매몰차게 내보내는 이유가 된다. 경찰이 된 영호를 찾아온 첫사랑 순임은 영호가 ‘착하고 순수해서’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찰이 된 영호는 더 이상 어릴 적의 그 순수함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녀를 매몰차게 보내버린다. 자격지심에 그는 그녀를 떠나보낸 날 밤 회식자리에서 혼자 미친 듯이 자전거를 탄다. 영화 속 주인공 영호는 이러한 충격들을 겪으며 인생이 망했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박하사탕>, 순임을 매몰차게 보내버린 날.


이 세 가지 충격들은 모두 영화의 재미를 위해 극대화된 모습이다. 하지만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겪었을 충격들이다. 우리 사회는 짧은 시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겪었다. 산업화운동, 민주화운동. 두 가지 큰 역사적 흐름에서 빗겨 나 살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흐름에 있었건 우리 사회는 그동안 너무 빨리빨리 변해왔다. 부모님 세대는 모두 이 빠른 역사적 흐름을 몸소 겪고 지금 우리 앞에 계신 분들이라는 뜻이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 탓만 하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개인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그 사회는 어떤지 들여다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박하사탕>은 그 사회를 잘 포착해낸 웰메이드(well-made) 영화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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