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의세계 Feb 23. 2022

엄마, 나는 회가 먹고 싶은 게 아냐

"엄마가 해주는 밥이랑 반찬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더라고."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강릉에 살았다.

변변치 않은 놀거리와 작디작은 시내에 지친 나는 늘 서울 상경을 꿈꿨고, 서울로 가기 위한 거마비를 벌기 위해 나는 주말마다 횟집 알바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에 이런 노동착취가 없는 12시간 이상의 근무시간. 오전 10시까지 출근해 퇴근시간은 새벽 2-3시. 어림잡을 수 없는 퇴근시간의 정의는 손님들이 나가실 때까지였고, 미성년과 야근수당이라는 보호장치는 그때 내 머릿속에 탑재되어있지 않았다. 퇴근할 때는 젖은 빨래처럼 축 져진 몸을 이끌고 매니저님이 주는 돈 봉투를 줄 서서 받은 뒤 퇴근 승합차를 타면 그 날의 하루가 끝이 나는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어린 아르바이트생들은 그 날의 값진 오만 원을 두 손에 꼭 쥐고 승합차가 내려주는 집 근처 도로에서 새카만 새벽을 맞이했다.


횟집 알바는 내가 했던 일반 알바들보다 서너 배는 더 고단했다. 수많은 곁들이찬 그릇과 회가 놓인 무거운 사기그릇들. 3층 식당의 테이블은 어찌나 많은지 서빙 실수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아 층 별 주방은 늘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도 친구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기에 바쁜 와중에도 시선이 얽힐 때마다 웃곤 했는데, 그것도 너무 바빠버리면 같은 공간에 있는지 무감해지는 것이었다.


자정이 넘고 새벽이 다가오면 한 두 테이블씩 빠져나가며 조금의 숨 쉴 틈이 주어지는데 그때가 바로 일한 만큼 배가 고파지는 시간이었다. 바짝 지쳐버린 몸으로 손님상의 빈 그릇들을 회수하는데, 남겨진 회들은 어찌나 많고, 남긴 곁들이찬은 또 어찌나 맛있어 보이는지.

거의 손을 안 댄 곁들이찬은 매니저님의 허락 하에 주방에 가져와 조금씩 먹기도 했지만 회는 비싸다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남겨지더라도 다시 메인주방으로 회수해갔다. 물론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 때의 일이다.


여느날처럼 늘 그렇듯 새카만 새벽까지 알바를 하다 손님상을 치우는데 광어회가 열 맞춰 남겨져있는 것을 보게 됐다. 세상 하얗고 깨끗해 보이는 광어회의 모습에 젓가락을 들어 홀린 듯이 열 맞춘 그 광어들을 한 번에 집어 들어 먹었다. 냠냠 쩝쩝. 차마 초장을 찍어먹을 여유는 없었기에 급하게 입에 밀어 넣었는데 아무 소스도 묻지 않은 그 생 광어회가 어찌나 맛있던지.

나는 그 날 알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뻐근한 다리와 팔을 주무르며 몰래 먹은 광어회의 맛을 엄마에게 신나게 자랑했더랬다. 물론 엄마도 내 수준급의 맛 표현을 들으며 함께 웃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광어회를 사 먹을 수 있게 된 30대가 되었고, 10대 때의 고단했던 횟집 알바의 기억은 진짜 사회생활 스트레스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으로 흐려졌지만 엄마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엄마는 그 날부터 내가 30대가 된 지금까지 유독 "민주는 회를 좋아하잖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 커오며 그냥 '내가 회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러시나 보다.' 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비린 맛을 싫어해 연어도 못 먹고, 참치도 못 먹는 세상 별난 입이고, 먹는 회라고는 광어회밖에 없는데 왜 내가 회를 좋아한다고 하는 건지 갑자기 궁금해져 어느날엔가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 내가 회를 좋아해?"

"응 너 회 좋아하잖아."

"나 광어회밖에  먹는데?"

"너 알바할 때 손님들이 남긴 회 집어먹었다고 했잖아. 그게 너무 맘이 아파서 엄마가 나중에 꼭 회 사줘야지 두고두고 생각했어."


엄마는 그때의 그 대화가 우리 딸의 재밌는 에피소드 정도로 여겨지지 않았고 회를 너무 좋아하는 딸이  알바 중에 손님이 남긴 회를 주워 먹은, 그런 가련한 이야기로 각색되어 엄마의 기억 속에 깊이 꽂힌거다. 그것도 굉장히 애틋하고 아련하게.

아니라고, 나는 그저 배가 고파서 회를 집어 먹었고 그때의 그 맛이 감명 깊었을 뿐이라고 두고두고 설명해도 엄마에게 나는 이미 먹고 싶은 걸 배불리 먹지 못했던 배고픈 콩쥐이자 가련한 신데렐라가 되어있었다.


엄마는 늘 건강식을 고수했다. 외식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고, 먹고 싶다고 했던 모든 음식들은 2-3일 내로 엄마의 손 맛을 거쳐 우리 집 식탁에 올라왔다. TV로만 봤던 대단해 보이는 기름진 음식들은 엄마 손을 거쳐 건강식으로 탈바꿈해 그 맛 그대로 재현됐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 덕분에 제철 식재료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들을 모두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맛있는 음식은 곧 엄마의 요리였기에 엄마가 "민주가 회를 참 좋아하는데.." 하는 중얼거림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울컥해져오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엄마표 밥상은 하나하나 정성이었고, 사랑이었고, 그때의 그 광어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의 꿀맛이었는데.


'모든 것을 다 해줘도 더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맘'이라는 흔하디 흔한 이 말이 나를 포함한 자식 계몽을 위한 문장인줄만 알았는데, 우리 엄마의 모습으로 직접 체감하게 되다니. 30대가 된 요즘은 엄마를 보며 마음이 저릿해지는 순간들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아직도 엄마와의 시간보다 우선인 것들이 많은 나라 철이 들기엔 아직도 먼 것 같은데. 순간순간 느껴지는 엄마의 커다란 마음들을 이제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게 된걸까.


긴 세월 동안 너무 많이 써서 닳아버린, 두 번의 수술을 치러낸 엄마의 아픈 팔을 볼 때면 그때의 나에게 딱밤이라도 때리고 싶다. 에이씨. 이렇게 엄마 맘에 오래 남을 줄 알았다면 그때 그 광어, 그렇게 맛있어하지 말걸.

 

작가의 이전글 내 첫 공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