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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가장 멋진 세계 Feb 23. 2022

내 첫 공간

처음의 시작, 5년 간 함께했던 반지하를 떠나보내며.

비가 오는 날에 반지하 방에 들어가면 그렇게 습할 수가 없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잔뜩 젖은 빨래가 된 기분으로 새 제습제 몇 개를 뜯어내며 비 오는 오늘 밤이 많이 요란스럽지 않기를 바랐다.

마음 한편 축축한 밤에 대한 고독과 빗소리의 낭만이 함께하는 밤이었다.

어떻게 무언가 할 수 없는 마음으로 밥을 먹고 몸을 뉘인다.

TV도 없는 밤, 라디오를 틀어놓고 이리저리 몸을 굴려내며 조금이나마 덜 눅눅한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잠이 든다.

나의 반지하는 고독을 알게 해 준 공간이었고 나에겐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추운 겨울 보일러가 말썽을 부려 차디찬 물로 씻으며 눈물이 핑 돌았던 적,
새벽녘 갑자기 빈 속에 먹은 진통제로 꼬인 배를 붙잡고 울면서 밤샜던 기억.
합선으로 불이나 건물 사람들이 모두 나와 119를 기다리던 기억.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매일 밤 울던 기억.

작은 노트북으로 머리를 맞대고 떡볶이를 먹으며 꼭 붙어있던 사랑스러운 기억.
스스로 견뎌내야 하는 우울이 너무 버거워져 매일 밤 공원을 향하던 기억.

맥주 몇 캔, 그리고 잔잔한 영화와 함께 하던 수 많은 밤들.
내 5년의 기억은 그렇게 켜켜이 쌓여갔다.

아늑했다. 내 첫 자취방은, 많이 고독했지만 아름다웠다.
수많은 내 우울과 속상함, 기쁨과 벅차오름이 잔뜩 배어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나올 때 더 뒤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5년 동안 내 모든 밤이었던 그 공간에 대해 적는 것이
그때의 내 감정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 많이도 망설였다.


공간에 대한 상실은 슬프지는 않았지만 먹먹했다.
마치 잔뜩 묵혀두었던 물건을 무심코 꺼내 들었을 때 피어오르는 먼지처럼.
갑작스레 모든 기억들이 나를 덮쳐올까 두렵기도 하면서 또 설레었다.


마지막 날, 짐을 모두 빼내고 잠깐 둘러본 게 다였다.

내 사회생활의 첫 시작과 끝내주게 답답하고 뜨거웠던 연애의 기억들,

인테리어랍시고 채워 넣었던 예쁘고 귀여운 인형과 싸구려 조명들,

참 정성스럽게 벽에 붙여놓았었던 CGV에서 가져온 청춘 영화 포스터.

신대방삼거리역 반지하는 그렇게 애틋하고 습습한 기억들을 남긴 채 나와 이별했다.


기억은 모두 각인된다. 그때의 기억들로 지금의 내가 있다.

예전의 나는 그때의 내 모습과 기억을 꺼내는 것조차 불안하고 힘들었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내가 나를 사랑하고자 부단히 애쓰던 그때의 내 모습이 밉지만은 않아서.

나의 수 많은 시행착오를 받아주던 내 집과, 그때의 내 모습들이 기특해서.

공간에 대한 기억은 좋건 싫건, 어느 순간 그 때의 나를 다시 꺼내 내 앞에 데려다준다.


이 간단한 이야기를 길게 적어내는 이유는 애틋했던 내 첫 집에 대한 마지막을 너무 담백하게 맺어버린 미안함에 대한 회고.

서툶으로 가득했기에 참 따뜻했고, 또 끝없이 고독했던.

고마웠어. 반지하 내 작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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