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엄마의 눈물샘이다.
엄마, 그건 엄마의 잘못이 아냐.
엄마는 엄마를 떠올리면 늘 운다.
찾아갈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당신을 탓하며 그렇게 엄마가 떠오를 때마다 아이처럼 운다.
엄마의 딸인 나는 그럴 때마다 입을 굳게 다문다.
그 슬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어서 그냥 입을 꾹 닫아버린다.
할머니는 치매가 찾아와 오랜 시간 요양원에 계셨다.
엄마는 그 누구보다 할머니를 사랑했다. 엄마의 딸인 내가 느낄 만큼.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긴 거리를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매주 할머니를 찾아갔다.
늘 할머니가 좋아하는 카스타드와 바나나, 잘 씹을 수 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하고서.
지긋지긋한 코로나가 찾아왔고 면회조차 되지 않을 때, 그때 할머니는 하나님께 가셨다.
그 소식을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꽤나 덤덤했기에 나는 어른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냥 그런 줄 알았다.
장례식 내내 엄마는 분주했다.
나도 덩달아 분주했고 발인을 다녀온 엄마의 얼굴은 새빨갛게 부어있었다.
누구보다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우리 엄마는.
그때도 나는 몰랐다. 나는 장례식 기간 중간에 친가 어른들을 모시고 집으로 와야 했기에
장례식의 마지막까지 엄마와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
화장 후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골을 어디에 모셔야 할까 어른들끼리 모여 이야기했다.
무덤은 생전 크리스천인 할머니를 위한 방식이 아니었고,
장례비용도 만만치 않았는데 납골당도 꽤 많은 비용이 들었다.
엄마의 형제는 큰오빠와 여동생, 그리고 막내 남동생 4남매다.
큰삼촌은 마음이 아픈 시기가 있었고, 집에서 가장 역할을 했던 건 늘 우리 엄마였다.
장례식 비용도 겨우 입을 맞춰놓은 터라 더 들어가야 하는 돈 때문에 형제끼리 큰 소리가 오갈까,
엄마는 나서서 공동으로 유골을 뿌릴 수 있는 유택동산에 모시자고 했다.
할머니도 가족들이 돈문제로 걱정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겠지.
형제들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했고, 그렇게 할머니의 유골은 유택동산에 모셔졌다.
그리고 그 선택은 두고두고 우리 엄마의 가장 큰 후회가 되었다.
어느 날 큰삼촌에게 전화가 왔는데,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유택동산을 찾아갔다고 했다.
유택동산은 일정 시간이 지나 유골이 모이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고 한다.
큰삼촌은 어딨는지 모를 그곳까지 할머니를 보러 갔다.
넓은 땅에서 할머니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 것이, 그렇게 슬프더라고 엄마에게 전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얘기를 나에게 전하며 엉엉 울었다.
찾아갈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나쁜 딸이라 자책하며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엄마가 얘기했다.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그렇게 슬픈 거라고.
의미 있는 대화를 주고받지 못하고 늘 신경 쓰고 챙겨주어야 하는 가족이었음에도, 할머니의 존재만으로 엄마는 안정감을 얻고 있었다. 그게 내 엄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의 눈물샘이다.
할머니가 무엇을 원하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엄마만이 감당해야 할 슬픔이 아니라고 위로해주고 싶은데 나의 작은 그릇으로는 어떤 식으로 위로를 해야 할지 늘 모르겠다.
나도 우리 엄마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