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평온하게
한동안 머리를 싸매는 글을 많이 썼다. 오늘은 오랜만에 여유롭게 노트북을 켜고, 의식의 흐름대로 타자를 치고 있다.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은 대학로의 카페에 앉아 있다. 콘센트를 발견한 순간 마음의 평온함이 30% 증가했다.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는 데이식스 노래가 나오고 있다.
더치 아이스 라떼를 시켰다. 커피콩 모양으로 얼린 더치 콜드 브루 아이스 위에 우유를 부어 먹는 메뉴이다. 더치커피는 많이 진하니까 잔 바닥에 커피가 가라앉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오히려 우유가 가라앉는다. 다시 생각해보니 당연히 물보다 우유가 밀도가 높을 것 같다. 어쨌든 빨대 끝이 우유 층에 꽂혀 있어 일정한 맛의 라떼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편안해졌으니 다시 타자를 치면서 수다를 떨어 볼까.
사실은 오랫동안 피곤함과 무력함이라는 감정을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대한 불안함도 커서 항상 일을 벌이거나 뭘 하면서 살아왔다. 프로젝트가 많은 수업을 일부러 고르고, 글을 많이 쓰고, 뭘 만들고, 대외활동에 참여하고. 사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떤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로 '뭔가를 채우는 시간도 가지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문득 생각났다. 뭔가를 많이 해도 지치지 않고 재기 발랄하던 시간이 언제였던가. 돌아보니 그땐 내가 가진 것과 보여줄 것이 정말 많았다. 많이 읽었고 체험했고 경험했기 때문에. 언제든 들려줄 이야기와 보여줄 것들이 가득했다. 내가 산출할 것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았던 거다.
우습게도 지금은 그 정확한 반대에 위치해 있다.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내 생각, 감상, 지식, 시야, 그 모든 것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럴 만도 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난 나로부터 마구 꺼내 쓰고 찔끔찔끔 채워 넣는 생활을 반복했으니까.
이번 여름과 가을은 그래서 채워 넣는 시간을 갖겠노라고 다짐했다. 오늘 대외활동 면접을 보고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나름 풍부한 경험을 하면서 배울 수 있는 곳에 지원했으니 투입이라고 퉁쳐도 되지 않을까.
좋은 공연들도 많이 예매했다. 가계부 어플을 보니 이번 달 지출한 돈이 다른 달의 두 배는 되지만, 내 마음이 좀 더 충만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관대하게 스스로 투자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에도 친구로부터 좋다고 추천받은 연극을 보러 간다.
오전은 면접으로 나를 쥐어짜는 산출의 시간이었지만 오후는 나름 편안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공연을 기다리는, 투입의 시간이다. 산출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오늘은 투입과 산출이 딱 균형을 이루는 하루다. 저울의 무게추가 투입에 좀 더 기울어질 수 있는 방학을 보내기로 다시금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