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며칠 전, 드디어 공연장에서의 ‘두 칸씩 좌석 띄우기’가 완화되었다. 작년 12월 8일 정부가 수도권 거리두기 2.5단계를 적용하면서 시행한 지 약 두 달 만이다. 전에도 이미 ‘퐁당퐁당’ 앉기라고 부르는 좌석 한 칸씩 띄어 앉기는 실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강화된 정책으로 공연장에만 두 칸씩 좌석 띄우기를 의무화했던 게 풀린 것이다.
반가운 변화이지만 많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칸씩 좌석 띄우기가 실행되는 기간 동안 이미 침체된 공연예술계는 더욱 많은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작년 말 출범한 한국뮤지컬제작자협회의 호소문에 따르면 보통 대극장 공연 한 회차의 손익분기점을 넘기 위해서는 60~70%에 해당하는 좌석 점유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두 칸씩 좌석 띄우기는 공연장에 입장 가능한 관람객도 좌석의 30%로 제한했다. 이미 상당한 가격의 대관료를 지불하고 공연을 멈추었다가 간신히 재개한 것인데, 그 와중에 공연을 열면 적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거리두기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글도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다. '공연장 두 자리 띄어앉기, 근거가 무엇입니까?'라는 글이다. SNS에서도 업계 종사자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뮤지컬 배우 김지우는 스토리에 청원 글을 언급하며 “공연계가 숨도 쉬지 못한 채 가라앉고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SNS 반응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예술계의 어려움에 대한 공론화를 바라보는 일부 대중의 시선이다. 특히 김지우 배우의 SNS 게시물에 대해 꽤 많은 사람들이 경솔하다고 비판했다. 물론 그 기저에는 방역지침을 완화했다가 확진자가 발생하면 어떡하냐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장 등의 시설에서 코로나 확진자 방문 이후 연쇄 감염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댓글에서는 과도하게 방역에 대해 우려하거나 예술계를 크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나마 두 자리 띄어 앉더라도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라.” 예술계의 침체에 대해 보도한 기사 댓글창에서는 급기야 이런 발언이 등장하기도 했다. “예술이 노동은 아니잖아. 사정이 안되면 노동해야지.” “택배나 대리기사로 생계유지하는 사람들 더 많다.”
기사 댓글의 모습.
이들의 발언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 예술인들은 당장 꼭 필요한 일에 종사하거나 필수적인 가치를 생산해내는 이들이 아니다. 즉 예술인과 예술산업은 생활에 필수적인 영역이 아니다.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그러한 주변적 가치의 생산과 추구는 사치이며, 이들이 하는 일은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노동’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생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예술계의 편의를 봐줄 필요가 있을까? 경제적으로 힘들다면 ‘진짜 노동’을 해서라도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적인 수순 아닌가?
바로 여기에서 오래된 논쟁 주제, “예술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순교자와 베짱이
물론 이 문제는 다양한 차원의 논의거리가 얽힌 매우 복잡한 이슈이다. 당장 이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예술은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그 가치는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인이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생산물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가? 짤막한 글 안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모두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과 노동에 대해 주로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공연예술계 이슈를 대하는 태도나 복지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이다.
대중이 예술을 바라보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시선이 있다. 첫 번째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관점으로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시선이다. 이 관점에서 예술의 가치는 시장에서 그것이 내는 성과와 수익 중심으로 평가된다. 아마 이런 시선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는 마가렛 대처 총리의 발언일 것이다. 대처리즘이라고도 불리는 대처 총리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부의 역할은 최소화하고 시장의 경쟁을 강조했다. 이런 기조에 따라 각종 복지 또는 보조 예산이 감소했는데, 여기에는 문화예술계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당시 국립극장 디렉터 피터 홀은 이러한 예산 감액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시했고 그에게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처럼 할 수는 없겠나?”[i]
1980년대 당시 웨버는 <캣츠>, <오페라의 유령> 등 전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메가뮤지컬의 제작/작곡자였다. 그가 거둔 상업적 성공은 바로 대처 총리가 바라는 예술계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바로 시장 경쟁력이 있는 작품, 경제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민간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대처 정부의 예술 분야 장관이었던 리처드 루스는 ‘충분한 소비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가’가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장 경쟁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예술은 ‘가치’가 없고 그렇다면 그런 예술과 예술인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원리라는 사고가 기저에 있다. 이들에게는 ‘대중의 요구’에 호응하는 예술이 좋은 예술이다. 우리나라 정당들이 선거 전 발표하는 문화예술 분야의 공약이 대부분 한류산업, 문화강국을 강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두 번째 시선은 예술을 보다 고전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오스틴 해링턴의 표현을 빌려온다면, 이는 예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개념 구상’이다.[ii] 이러한 관념을 따른다면 예술은 영원, 절대, 초월적인 진리를 담고 있으며 내재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예술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즐기면서 사람은 지성과 인간성의 고양을 느낀다.
이러한 전통의 대표적인 예시는 ‘고급문화’의 훌륭함을 주창했던 영국 학자들의 계보에서 찾을 수 있다. 매튜 아놀드는 문화를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정수”라고 정의하며, “아름다움, 감각적 미와 명쾌한 지성에 대한 열망은 모든 면에서 완전해질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며 이런 완벽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지닌 궁극적인 이상”이라고 말했다.[iii] 엘리엇, 리비스 등 아놀드를 위시한 일군의 학자들은 이렇게 인간이 교화, 고양되기 위해 추구해야 할 고급문화의 요소로 예술을 꼽았다. 이러한 태도는 반대로 노동자 계급 또는 대중의 문화를 고급문화와 대비되어 낮은 것으로 표상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문화에 경계를 그리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많은 비판이 등장했으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고급문화, 대중문화, 하위문화의 경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예술일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고급문화로 판단하고 교양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취급한다. 예컨대 뮤지컬을 관람하러 가는 행위는, 그 장르 안에서 상업적인 것과 비상업적인 것에 대한 구분과 논쟁이 존재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직도 무언가 ‘있어보이는’ 행위라고 비추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좀 더 순수예술 쪽인 회화나 클래식 감상도 마찬가지이다. 이 맥락에서의 예술은 일상적인 우리의 현실과는 유리된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예술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앞서 이야기한 두 관점 사이를 진동한다. 일견 달라 보이지만, 두 관점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예술가는 실용적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가는 특정 성공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경제적으로 인정할 만한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관점에서의 설명이라면, 예술가의 생산물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내재적인 가치를 가지며, 경제적인 것과 분리된 영역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관점의 설명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관점을 따른다면 시장의 성공을 거두지 못한 예술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실질적’인 노동을 하거나, 사람들의 이데올로기 속 모습처럼 가난하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예술 자체가 어떤 사람들에게 생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술이 노동은 아니다”라는 앞선 발언이 꽤 많은 공감을 받는 것도 우리의 관념 속에서 예술가가 이 두 가지 관점 중 하나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의 한 마디는 이 두 극단이 어떻게 공통적으로 예술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 드러낸다. 2011년 병환으로 숨진 고 최고은 작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재능있는 작가였다. 어리석고 무책임하게 자존심 하나만으로 버티다가 간 무능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녀를 예술의 순교자로 만드는 것도, 알바 하나도 안 한 무책임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 할 양극단이라는 것만은 말해두고 싶다.”
‘가난한 예술가’를 위한 문화예술 지원 정책
“… 문화예술이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와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사회에 퍼져 있음을 마주할 때, 예술인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예요. 지금은 그저 삶의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해온 문화예술의 숨이 끊어지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정유란 문화아이콘 대표가 한 말이다. 코로나 이후 타격을 입은 문화예술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볼 때, 이런 실망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코로나가 대거 유행하기 시작한 2020년 상반기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 정책은 다음과 같았다. 소규모 공연장 중심 방역용품 지원, 공연/전시관람료 할인쿠폰 발급, 창작준비금 지급, 예술인 생활안정자금 융자, 방송 사업체에 대한 지원.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대부분 기업 또는 단체를 겨냥했다. 방송 사업체에 대한 지원 사업 계획은 존재하고, 방송 노동자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이 없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개개인의 예술인에게 돌아가는 도움은 적었다. 저소득 예술인을 대상으로 300만원을 주는 창작준비금 사업의 경우 규정 상으로는 중위소득 120% 미만의 경우를 수혜가능 기준으로 잡았으나, 1만 4000여명에 달하는 신청자와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상반기의 수혜자 커트라인 상한선은 월 소득 28만원까지였다.[iv] 또 다른 보조금 정책인 생활안정자금 융자의 경우는 저금리로 대출을 제공하지만, 예술인들 중에서 고소득자 또는 안정적 고용형태를 가진 사람이 적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커다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융자는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러 전문가와 예술계 종사자는 정부의 지원 정책이 시혜적인 것에 그치거나, 선별적이고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v] 사실 이러한 문제는 코로나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중앙 예술지원기관과 지방재단의 사업은 주로 사업자/향유자 중심의 정책을 집행했기 때문에 예술인의 생활 복지보다는 창작 지원이, 또 창작 지원보다는 시민들 중심의 문화향유사업 지원이 더 많았다. ‘창작은 일부 지원해 주되, 생계는 알아서’ 해결하는 방식의 지원정책이었던 것이다.[vi]
생활 부분의 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습은 특히 고용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근로자의 경우 일자리를 잃게 되면 실업급여 등 여러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단기간, 단발성 고용 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경우가 많은 예술인은 ‘일정 기간 동안 연속하여 특정 주체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근로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서면 계약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을 때도 많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계 종사자의 다수는 고용보험과 근로자법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다. 코로나 19 이후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더 치명적이다.
왜 예술계 종사자들은 근로자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코로나 19라는 심각한 사회적 재난 속에서 생업으로서 예술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또 예술분야에 대한 지원은 왜 그 창작자에 대한 복지를 잘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서 언급한 대중이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과 예술인의 필요성, 복지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의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한 공감대 형성 없이 진행하는 정책은 예술계에 대한 선별적 특혜라는 비판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한편 우리나라보다 예술인에 대한 지원 제도가 체계적으로 자리잡은 해외의 사례를 보면 제도 뒤에 명확한 ‘아이디어’가 존재한다. 프랑스의 예술문화 정책은 ‘국가 정체성과 직결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국가의 영광과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며, 각종 지방 축제와 행사에서 예술계와의 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독일에서는 ‘문화시민권’과 ‘모든 국민을 위한 문화’라는 목표 아래 다양한 문화기관의 설립과 공공 지원이 이루어졌다. 영국 문화 정책의 목표는 ‘국민의 삶이 문화예술을 통해 “최고의 것”을 얻게 만들기’이다.[vii]
독일의 문화부 장관인 모니카 그뤼터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문화는 결코 좋은 시절에만 누리는 사치품이 아니라 인류의 표현방식이다. 위기의 시기일수록 예술가들은 창조적인 힘을 발휘해왔으며, 이런 전례 없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 사회는 고유하고 다양한 문화와 미디어의 지형을 지켜내야 한다.”[viii] 예술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제공하는 가치를 명확하게 인지한 모습이다.
이 국가들의 경우 사회적 합의 덕분에 생계 차원의 예술인 복지가 잘 자리 잡힌 편이다. 프랑스는 예술활동을 하는 기간을 고용 상태로 간주하는 ‘엥테르미탕’ 제도가 있어 공연예술 분야 종사자들은 한 작품이 끝나고 일반 근로자들처럼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다. 각종 예술인 협회에서 연금과 사회보험을 보장해주기도 한다. 독일의 ‘예술가 사회 금고’ 제도는 사회보험과 연금을 정부가 제공한다. 코로나 이후에는 창작자에게 3개월 간 최대 9000 유로(약 1200만원)의 생활 지원금을 지원했다. 영국은 극장 및 예술단체 등이 직원 고용을 유지하면 정부가 월 임금의 80%를 부담하는 형태의 지원 정책을 진행 중이다. 이러한 공적 지원 외에 민간 영역의 후원 사업과 캠페인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인 고용보험 시대의 시작과 새로운 시야의 필요성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예술인에 대한 실제적 복지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예술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면 예술은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심심함과 무료함을 달래주는 것은 물론 작품을 통해 사회에 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의 여가를 알차게 보내도록 만들어주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예술이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예술이 ‘사회적 자본 형성’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술 행위는 곧 공공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기도 하다.
이렇게 예술의 필요성이 전제되고 나면,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활성화되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예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각종 창작지원금과 공모 사업 등 ‘창작’ 측면에서 필요한 지원 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삶의 안전성 없이는 창작 활동이 어려우므로 이 부분에 대한 해결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예술인을 한 명의 노동자로 인정하고 사회적 가치 생산의 주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Photo by Jack Dong on Unsplash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2020년 12월 중순부터 <예술인 고용보험 의무적용법>이 발효되었다. 기존 고용보험법은 근로기준법에 따른 근로자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근로계약을 체결한 임금근로자만이 보호대상이었다. 같은 예술 창작 행위를 했더라도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고 일하면 근로자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즉 예술 행위에 대한 노동자성과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적용되는 법은 ‘문화예술용역 관련 계약’을 맺은 예술인이 가입 대상이다. 고용보험이 적용되면 실업 도중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고, 일반 근로자처럼 출산전후급여가 보장된다. 이로 인해 예술인들은 처음으로 법으로 규정되지 않았으나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예술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이듯, 예술인들이 받는 보호와 노동에 대한 인정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기본 안전망이자 권리이다. 사회적 노동으로서의 예술을 인정해야 할 때이다.
송은제
미디어 전공생으로 세상을 공부해나가고 있습니다. 어렵고 머리 아프더라도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각주 및 레퍼런스
[i] “Margaret Thatcher casts a long shadow over theatre and the arts”, <The Guardian>, 2013.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