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에 대한 가볍고 짧은 에세이
* 몇 년 전 서양 미학 수업을 듣고 쓴 에세이이다. 오래 전에 쓴 글이다 보니, 다시 읽었을 때 부족한 점이 많았다. 벤야민에 대한 고찰을 더 넣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건 어린애도 할 수 있겠다.” "요새 개나 소나 다 예술이래.”
현대인 대부분은 예술 상대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위의 따옴표 붙인 문장들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결국 누구나 다 예술을 할 수 있으며, 그 어떠한 작품도 ‘예술적’이라고 평가하기는 개인 나름에 달렸기 때문에 함부로 작품에 대해 객관적인 예술성의 잣대를 들이대기 힘들다는 말 정도 될 것이다. 엄격하게 예술의 규칙과 기준이 존재했던 몇 백 년 전과는 달리 사람들은 예술의 범주에 대해 관용적이다. 아마 이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작가들의 등장과 18세기부터 등장한 주관주의 미학의 강세에 의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든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가? 가장 기괴하고 이상한 모양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분명히 평론가들이 ‘예술적이다’라고 극찬하는 작품들에 대해 일반 대중이 거부감을 느낀 적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스쳐가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무엇이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해서 전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예쁜 인형을 보고 보통 ‘예술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예술의 속성은 무엇일까? 무엇이 단순히 쾌락적인 것과 예술을 구분하게 하는가? 결론적으로, 무엇이 예술의 속성인가?
첫 번째 속성 후보: 아름다움
우리는 반사적으로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답하곤 한다. 그래서 예술 판단의 불일치 또한 아름다움의 불일치에서 온다고 으레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현대에서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미의 상대주의부터 시작해 보자.
로크의 흐름을 따르는 18세기 계몽철학자들을 보면 아름다움에 대해 비슷한 주장을 한다. 미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 그리고 그럼에도 성립할 가능성이 있는 미의 보편성 또는 객관성이 그들의 공통적인 주제이다. 우선 처음에 아름다움은 대상의 객관적인 성질이 아니라는 전제를 한다. 그 뒤, 오감에 대한 반성 인상으로서의 ‘내감’, ‘미감’, ‘내적 감각’을 통해 우리는 미의 쾌락을 지각할 수 있다. 타당해 보이는 견해다. 하늘에 넓게 펼쳐진 노을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색채의 다양함을 ‘쾌’로 환산하는 것은 외부 감각기관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감으로부터 얻은 감각적인 인상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의 존재를 볼 때 우리 안에 어떠한 내감이 있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에서 그들은 인간에 내재된 아름다움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것을 반성하는 것 자체에서부터 우리의 독립적인 기준이 아닌 사회적인 영향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허치슨의 경우 아름다움을 내감의 단순 관념이라고 정의했다. 마음의 작동이나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 감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고위도에 사는 사람이 중위도 온대 지역에 왔을 때 체감하는 온도와 저위도에 살다가 중위도에 온 사람이 느끼는 온도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에도 이러한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감각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을 갖는 2차적인 작용에서 우리 모두가 같은 것을 느낄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말초적인 쾌락이 아닌 이상 쾌감, 혹은 흄이 이야기한 불쾌, 혐오, 공포 등의 인상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작용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뱀을 친근한 동물로 학습하고 자라온 원시인과 다른 사회의 사람이 사실적이게 만들어진 뱀의 조각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판단의 오류’, ‘오류 가능성’이라는 항목 아래 허치슨이 전제하고 있는 미적 불일치의 경우이기는 하다. 그러나 ‘학습된 모든 것을 걷어낼 때 우리는 결국 비슷한 쾌감을 가질 것이다’라는 허치슨에게 한 번 더 반박해 보자면 그 어떠한 감정도 원초적인 감정, 즉 생명의 위협이나 번식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한 학습된 감정일 수밖에 없다. ‘학습된 모든 것을 걷어낼 때 우리는 말초적인 감각적 쾌락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가 바로 허치슨과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의 내 주장이다.
아마 그래서 허치슨과 비슷한 궤를 달리는 18세기 경험론적 미학의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을 자연미로부터 파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칸트를 예시로 들어 보자. 칸트 미학에서 취미 판단의 성격 4가지 중 ‘주관적 보편성’에서는 취미 판단(미적 판단)을 무관심하고 자유로운 만족이기에 다른 이와 일치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주관적인 감정이나 만족 등의 요소를 배제한 상태에서의 만족은 인간의 원초적인 무엇일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비슷할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공유할 ‘원초적’인 것은 어느 수준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칸트 미학에서 아름다움이 자연미로부터 전제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볼 때, 그다지 많은 범위의 인상이나 감정을 공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와 비슷한 반론을 펼칠 수 있는 부분은 더 많다. 허치슨과 같은 철학자들은 미적 판단의 불일치를 경험의 불일치, 연합관념 등의 존재로 돌렸다. 흄 또한 진정한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판관은 취미의 섬세함, 부단한 연습, 편견의 부재, 양식 등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다. 앞에 주장한 반론이 성립한다면 이들은 감각의 보편성은 일종의 경험에서 나옴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판단의 불일치를 경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된다. 인간에게서 편견, 연합관념, 교양 등 사회에서 더께처럼 내려앉은 요소들을 제거한다면 과연 우리는 제대로 무엇을 ‘지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기는 할까?
여기서 객관성의 새로운 여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디드로의 철학이다. 디드로는 미의 인식과 판단에서 감수성과 경험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데, 아름다움은 감각 경험에서 비롯하는 것이 맞지만 이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추상적인 개념, 취미도 결국엔 경험의 축적이라는 주장이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 보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왜 그의 작품을 비판했을까? 모두 사회의 경험에 의한 편견 등에 갇혀서일까? 오히려 그렇다고 친다면 근원적인 내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미적 판단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내감이 아닌 사회적 경험의 보편성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장을
전개하는 형식의
시를 아름답다고 하는 이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비슷한 종류의 시를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아마도 참신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다면 그 ‘참신함’이라는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되돌아본다면,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관념의 탈피에서 느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관념은 사회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국적인 것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또한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은 결국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보편성이다. 이것이 기준이 되어 우리는 쾌감을 재단하고 정의해서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두 번째 속성 후보: 정신의 함유
아름다움은 예술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항상 절대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유명한 예술작품의 복제품이 있다고 해 보자. 아무리 아름답고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작이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예술품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진다. 바로 여기서 예술의 두 번째 속성, 정신의 함유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보통 우리는 ‘즐거운 것’과 ‘예술적인 것’을 구분하는 편이다. 말초신경의 쾌감을 자극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예술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회 보편적인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을 때도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려면 무엇인가 특별한 게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술가가 작품에 담은 정신적인 가치이다. 아까 모작의 예시를 다시 들어볼 때, 같은 작품임에도 우리가 원작에 예술적 가치를 높게 매기고 그것을 더 좋게 평가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아이디어와 참신함, 작품이 처음 선보여졌을 때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그 깊이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뒤샹의 <샘>은 그 깊이에 의해 평가를 받은 경우이다. 그가 출품한 작품은 그냥 시중에서 파는 남성 소변기에 간단하게 사인을 한 후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별 다른 점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사인도 아닌 그 변기를 제작한 사람의 이름을 멋들어지게 휘갈겨 썼다. 처음 뒤샹의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저것이 예술작품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알고 난 뒤에도 한쪽 구석에 짐처럼 처박아 놓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의 작품은 한 오브제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있다는 그 아이디어 때문에 주목받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혹은 뒤샹만큼 강렬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두드러지지 않아도, 그 표현력에서 참신하거나 작가가 열심히 고민한 흔적이 드러나는 작품들은 예술적이라고 평해질 가능성이 크다. 예술 쪽에서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들어가 보면 사진과 정확하게 똑같은 섬세한 묘사는 대부분 심드렁한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볼펜을 몇 번 슥슥 그어 그린 그림이지만 실루엣으로도 무언가를 효과적으로 묘사한 경우는 사람들의 찬탄을 받는다. 더 이상 ‘예쁘고 아름다운 차원’에서 끝나는 예술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아주 얕은, 그저 말초적 자극을 위한 상업예술과 같은 예술의 경우 현대사회에서는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정신적인 어떤 것의 함유와 창의성에서 우리는 또 한 종류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름다운 작품이 가지는 정신적인 깊이는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더욱 증가시킬 수 있는 요소이다. 물론 이러한 점을 금방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어떤 작품은 너무 난해하고 기괴하고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이 함의하는 바가 클수록 대중은 더 쉽게 그 작품의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고,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결국 그 작품에서 작가가 담고자 한 그 어떤 가치는 발견해낼 수 있다. 정신적인 것의 함유는 마치 내감을 이용하는 것처럼, 우리가 감지해 낼 수 있는 감각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의 속성 두 가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은 캔버스 위에 커다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귀를 밑에 써 놓은 그림이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결국 캔버스 위에 위치한 물감 자국은 현실의 본질이 아니라는 작가의 정신적인 메시지에서 오는 아름다움이고, 이 아름다움이 없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은 우리에게 감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해보자면 예술의 속성은 두 가지가 있다. 아름다움, 그리고 정신의 함유. 이 두 가지 속성은 함께 존재하며 따로 떨어져서 성립할 수 없다. 정신적인 가치가 작품에 들어가 있어서 참신하거나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더해주며, 이러한 아름다움이 작품에 없다면 우리는 대상을 보고 어떠한 인상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피상적으로 ‘난 예술이야’라고 주장하는 작품에 사람들이 결국 의심의 시선을 던지는 이유도 그것이다. 아름다움과 정신, 이 둘의 조화가 예술을 만든다고 감히 얘기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