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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Apr 27. 2020

캔버스 속 어린이의 모습을 좇다

카사트로부터 시작해 살펴보는 어린이 그림의 변천사

* 이 글은 2019년 초 예술잡지에 기고한 글이다.

아이와 목욕 (1891)



  ‘사물에 대해 나와 같은 느낌을 가지는 여인이 있다.’


드가가 이렇게 평한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인상주의 화가인 메리 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이다. 카사트는 미술사에 있어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남성이 예술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베르트 모리조와 함께 이름을 알린 여성 화가였고, 미국 출신임에도 유럽에서 활동하며 드가 등의 인상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그 화풍에 합류한 이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카사트의 화폭에 담긴 이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바로 어린이들이다.




Reine Lefebre and Margot before a Window(1902)


   카사트의 그림을 보면 르누아르와 드가, 마네가 저절로 연상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당대에 그들과 함께 교류하며 익힌 인상주의 화풍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카사트는 그녀의 동료 화가들과는 달리 주로 여성과 아이들의 일상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특징인 느슨한 붓놀림과 경쾌한 색채는 아이들 특유의 천진난만한 이미지와 잘 어우러졌다. 카사트의 작품은 붉게 상기된 뺨, 오동통한 고사리손을 꼬물대는 우리 머릿속의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듯한 그림이다. 카사트의 작품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비단 카사트 뿐만 아니라, 최근 몇백 년 간의 서양 회화는 그런 방식으로 아이들을 그려왔다. (동아시아권 회화에서는 아이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아 경향성을 찾기 어렵다.) 이들은 가정의 천사이자 깨끗한 영혼, 보호해야 할 사랑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의 ‘어린이’나 ‘아동’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은, 모성애 등의 개념들처럼 우리의 생각보다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다.

            



    시간을 많이 거슬러 올라가 이집트 시대로 가 보자. 옆의 벽화는 이집트 왕족의 사냥 장면을 그린 모습이다. 남자의 뒤에 있는 여자는 그의 부인이고, 다리 밑에 그려진 조그만 사람은 그의 아들이다. 고대의 회화에서 어린이는 자주 그려지는 대상은 아니었다. 또한 그려지더라도 커다란 머리와 앳된 얼굴의 특징을 살리지 않고 ‘작은 사람’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기조는 중세 유럽의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지속되었다.



  사실주의적이지 않은 화풍 등의 다른 요소를 그 이유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수렵채집 사회에서 어린이는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였다. 물론 이들은 아직 완전하게 발달하지 않은 개체라는 점에서 보호받았으나 그것을 넘어서서 어린이라는 이유로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은 부재했다. 농업사회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여러 문명이 발전하는 시기에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수렵채집을 했던 시기에 비하여 출산율은 늘어났지만 그만큼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의 죽음은 커다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부모들의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은 한정적이고 규제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베베리의 마돈나


  이러한 인식이 중세 시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고딕과 르네상스 직전 시대의 회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옆의 그림은 ‘베베리의 마돈나’라는 1350년경의 작품이다. 마돈나의 품에 안긴 아이는 단번에 ‘아이답게’ 그려졌다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사실 이 그림은 12세기 중후반대 작품이기 때문에 좀 더 온건하게 묘사된 축이고, 다른 중세 시대 그림을 검색해 보면 그 안의 아이들은 성인과 유사한 얼굴과 몸을 가진 것처럼 그려져 있다. 단지 신체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그림에서 성인 신체를 그리는 것처럼 아이 몸의 근육을 강조해 놓았다! (특히 복근의 강조를 자주 볼 수 있다.)


   프랑스의 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위의 작품처럼 아이들이 등장하는 수많은 회화와 문헌 자료를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아동’ 개념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12세기까지 중세 서구 예술은 아동기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근육질의 어른의 얼굴을 한 아이를 그렸다는 것은 ‘아이의 특징’을 묘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아이들은 작은 사람, 축소된 어른으로만 그려진 것이다.


   아리에스는 실제 삶에서도 어른과 아이의 인식에 대한 차이는 거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여러 사료를 통해 입증되는데, 아이들은 배내옷을 벗을 시기가 되면 성인들과 똑같은 옷을 입었다. 신분에 따라 입는 옷의 차이가 생겨났을 뿐, 크기만 작은 성인복을 입었던 것이다. 또 아이들 앞에서 성(性)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왕실 사람부터 일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음담패설과 성과 관련된 농담을 아이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했다. 아이들이 어른 문화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카드놀이와 주사위 놀이처럼 어른들의 도박 문화에 자주 어울리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그림 밖의 중세 사회를 살펴보자. 중세 시기의 특징은 종교가 확산하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부 고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다신교를 벗어난 유일신 체제의 세계종교가, 특히 가톨릭이 정치 권력을 압도할 정도로 확산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한 지역을 벗어나 널리 퍼진 세계종교는 1500년대 이전까지 아이들의 지위 변화에 복합적인 영향을 주었다. 종교는 낙태, 아이 버리기 등의 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아이들의 보호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이들에게 동정적인 방향의 관심을 늘린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원죄설은 동시에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을 정당화하고 어린이가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협박하는 공포스러운 방식의 훈육을 널리 전파했다. 종교는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중세 시기 예술 작품은 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만 허용되어 보통 예수와 마리아 등 성서의 인물들을 모티브로 했다. 그래서 그림에 등장하는 아기들은 대부분 예수의 모습인데, 이를 염두에 두고 근육질의 성숙한 중세 아기들을 보면 나름대로 이해가 된다.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를 보면 이제서야 우리가 아는 익숙한 ‘아이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술사 교수인 에버렛은 이에 대해 “중세 부모들이 르네상스 시기의 부모들보다 아이들을 덜 사랑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르네상스 시기에는 아이들에 대한 관념이 작은 어른에서 순진한 생명체로 점차 변화했을 뿐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생각 변화는 곧 어른들이 아이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드러났다. 예술에서 나타나는 아이의 모습은 그 사회가 아이에 대해, 예술의 목적에 대해, 혹은 부모로서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는 이상향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의 아이들에 대한 인식은 중세 시대에서 180도 다른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는데, 이러한 인식 변화의 부족함을 메운 것은 르네상스의 예술적 경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예술이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초점이 바뀌었고 과학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게다가 중산층이 부흥하면서 자신들의 자녀를 그림으로 남기려는 욕구가 결합되어 예수가 아닌 ‘일반인’ 아기들을 그릴 기회가 늘어났고, 이 아이들은 인간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Portrait of Maria Apollonia of Savoy (얀 카렉)


 

Eleonora von Gonzaga (피터 루벤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그려진 이 두 그림은 이전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설명한 바와 같이 아직 아이들은 어른의 옷차림을 그대로 모방한 복식을 입긴 했지만 대두의 포동포동한 모습으로 화폭에 담겼다. 어린이들은 이제 루벤스, 반 다이크, 상페뉴 같은 유명 화가들의 인기 있는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에 독자성을 부여하고 인격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음에도 아이들은 어느 정도는 kid(새끼)로서의 특성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아직도 부모들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웅얼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동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혐오하였고, 포대기에 싸서 걸어놓거나 뉘어놓는 경우가 잦았다. 모유 수유를 할 때 쪽쪽 빠는 행동도 비슷한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쯤 어린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처럼 정립된 것일까?


어린이 인식에 대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며 일어났다. 17세기 후반 정치사상가 존 로크는 어린이는 태어날 때부터 원죄로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는 ‘빈 서판’(tabula rasa)이기에 세심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기독교를 비난했다. 서양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였던 원죄설이 흐려지고 어린이가 올바른 교육을 받는다면 이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또 하나의 변화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정서적인 유대감의 강조였다. 18세기에 들어서서는 당대의 지적 경향을 토대로 어린이를 이상화하기 시작했다. 중산층과 관련한 문헌에서 어린이는 경이로울 만큼 순수하고 사랑으로 충만했으며,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때부터 아이를 ‘귀여워하는’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 잡았다. 이전까지는 영유아기에 한정되었던 귀여움의 정서가 아동기까지 확대된 것이다. 바야흐로 어린이의 개념이 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계몽의 시대를 거치며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라는 단어를 창조했다. 아기, 애, 조그만 녀석이라고 불리던 아동을 존중의 의미를 담은 한 개념으로 묶은 것이다. 그는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고, 아동의 권리 증진을 위한 활동을 열성적으로 진행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어린이라는 표현이 더 늦게 만들어졌을지 모른다.


      


Little Girl in a Blue Armchair (1878)


   이제 우리는 다시 카사트의 시대로 되돌아왔다. 왠지 그림 속 아이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어린이에 대한 이미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말이다. 푹신한 소파 위에 나른하게 늘어진 아이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곧 저녁을 먹고,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손길에 침대에 누워 잠이 들 것이다. 이전 시대, 또 그 이전 시대, 그리고 그 훨씬 전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이 장면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카사트의 애정 어린 붓놀림으로 그려진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할 뿐이다.



* 아동 개념의 변화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과 피터 스턴스의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에버렛 교수의 인터뷰는 https://www.vox.com/2015/7/8/8908825/ugly-medieval-babies 이 링크의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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