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만들기 체험에서 느낀 밸런싱의 중요함
향수 만들기 체험에 당첨됐다.
친한 친구와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같이 공방까지 산책 겸 걸어갔다. 지상에서 반 층 아래에 위치한 공방은 연보랏빛으로 인테리어 해둔 곳이었다.
평소 향수 자체에 대해 아는 건 많았지만 실제로 '향'에 대한 조예가 깊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향수 만들기 체험은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처음에 자신의 냄새(?) 취향에 대해 설문지를 작성하고 나서, 향료를 하나씩 시향해봤다. 얇고 긴 종이 조각에 향료 베이스를 묻히고 하나씩 냄새를 맡아봤는데 나중엔 하도 향을 맡아대서 콧속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원두 냄새 찬스를 세 번 정도 쓴 것 같다. 이렇게 향료 베이스 냄새를 맡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향과 싫어하는 향을 조금씩 기록해나갔다.
좋았던 향: 베르가못, 라벤더, 그린, 뮈게, 프리지아, 매그놀리아, 장미, 화이트 앰버.
싫었던 향: 피치, 자몽, 통카빈, 샌달우드, 시더우드, 바닐라.
(향료의 느낌과 이미지, 온도감 등을 정리해서 자신의 취향을 기록하는 걸 alfaction이라고 한단다!)
대강 기록지에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엔 본격적으로 향수에 넣고 싶은 향들을 추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맨 처음 받은 설문지에 평소 좋아하던 향이 찻잎 냄새, 과일 향, 허브 향이라고 썼었는데 알팩션에서 좋다고 체크해놓은 향료들도 귀신같이 딱 풀냄새나는 것들이었다.
가향 차에 많이 블렌딩 하는 베르가못, 잔디 뜯은 냄새 그 자체인 그린, 꽃향기인 뮈게, 프리지아, 매그놀리아, 장미. 그리고 은은한 화이트 앰버.
의외로 만다린, 자몽, 피치 같은 과일 냄새는 좋긴 좋은데 방향제 느낌에다 냄새가 너무 세서 생각만큼 좋진 않았다. 거기에 내가 싫어하는 묵직한 달달한 향을 빼고 나니 저렇게 남더라.
문제는 향료를 조합하는 그다음 단계였다. 원료를 묻힌 시향지를 몇 개씩 골라 들고 흔들어서 냄새를 맡고 조금씩 수정해나가는 작업이었는데, 내가 좋다고 고른 것들을 모두 뽑아 흔들어보니 그냥 꽃밭 그 자체였던 거다. 꽃의 풋풋한 냄새와 풀의 떫은 톡 쏘는 냄새가 그득한 게 꽃밭을 통째로 믹서기에 갈아 코 밑에 댄 느낌이었다.
'내가 만들고 싶던 건 이게 아닌데...'
글로 표현이 잘 안 되지만, 나는 풋풋한 식물 내음이 옅게 첨가되어 있긴 하지만 부드럽고 은은한 향수를 만들고 싶었다. 그니까 꽃밭은 안된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라스트 노트에 해당하는 화이트 앰버나 머스크의 비율을 높게 조정하고, 미들 노트의 꽃 향료 비율을 줄여봐도 그 풋풋한 냄새는 여전했다. 조향사 선생님이 계속 도와주셨는데도 여전히 애매한 느낌이었다.
조향사 선생님이 친구의 향수를 봐주는 사이, 혹시나 해서 아까 싫다고 체크했던 피치 향을 집어 시향지 묶음에 추가해보았다. 이렇게 뭘 추가하면 지나치게 풋풋한 냄새가 어떻게든 중화되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어, 근데 정말 괜찮았다. 단독으로 맡았을 땐 코끝이 아려올 정도로 센 피치가 다른 향들과 섞이니 적당히 새콤달콤한 느낌을 주는 거였다.
처음 선택했을 땐 절대 향수에 넣지 말아야지 하던 향료가 오히려 좋아하는 향료들만 모아놓았을 때보다 더 좋은 향을 만들게 도와준다니. 새로웠다.
결국 마지막으로 조합한 향에는 머스크, 피치, 피그(무화과 향)까지 추가하게 되었다. 나중에 추가한 이 세 향료는 단독으로 시향했을 땐 내가 싫어하는 냄새에 속했다. 그런데 그 향료들을 추가하는 걸로 레시피를 바꾸니 톡 쏘던 풋내가 내가 원하는 은은한 식물의 향기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내가 질색했던 바닐라, 통카빈, 샌달우드나 시더우드 같은 향료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고민해보고 있었다. 각자 최종적으로 완성한 결과들을 맡아보니 정말 괜찮았다.
좋아하는 것만 잔뜩 모은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구나. 오히려 싫어하거나, 안 좋아 보이는 것도 적절히 밸런싱하는 게 중요했던 거구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함을 다시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