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내 디자인을 계속 보고 싶어 할까?
나는 디자인 작업을 할 때, 디자인을 '하는' 시간과 '보는' 시간의 비중이 비슷한 것 같다. (남의 작업물이 아닌 지금 작업 중인 내 작업물을 보는 시간) 가끔 작업시간 대비 작업량을 보면 '어라, 이건 너무 비효율적인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보는' 시간도 디자인 작업 시간에 포함되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없기 때문이다. 계속 봐야만 드러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함으로 이 작업은 눈에 띄지 않을 뿐, 어떤 식으로든 작동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디자인을 '보는' 시간의 비율을 조금 줄이고 싶다.
내 디자인에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나는 나의 디자인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다. 퇴근 전에 파이널 버전을 꼭 휴대폰으로 전송해서 버스와 지하철에서 계속 들여다보곤 했다. 졸전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늘까지 진행된 작업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은 다음 침대에 누워 방금까지 봤던 내 작업물을 휴대폰으로 또 보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거울을 보고 싶은 마음과 비슷한 것 같다. 내 모습이 예쁘든, 못났든, 어떻게 생겼는지 내 눈에 담아 계속 보고 싶은 마음. 작은 거울 큰 거울, 이각도 저각도, 이 장소 저 장소에서 보듯 계속 보는 것이다. 이 정도면 디자인 나르시시즘 같은 게 아닐까...?
이 습관엔 분명한 장단점이 있다. 자기 검열이 될 수 있으나, 동시에 자기 오만에 빠지기도 쉽다.(음, 잘했네!로 끝날 경우) 시간 비중은 조금 조절해야겠지만, 나쁜 습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디자인과 그 과정을 보기 싫어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것들이 성찰의 과정과 닮아있다.
디자인 이론 시간에 교수님께 들은 말 중에서 인상 깊게 남아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인간은 관찰을 통해 고찰하고 고찰을 통해 통찰하며, 마지막으로 통찰은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더 높은 통찰에 이른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내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는 내 작업물을 볼 때, '관찰적 보기'와 '성찰적 보기'를 구분 지어 보아야겠다. 말하자면, 내 디자인을 관찰하는 시간보다는 성찰하며, 더 높은 통찰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디자인을 '하는'시간의 비중도 늘어날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보기'는 '관찰적 보기'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관찰적 보기도 분명 디자인을 하는데 필요하지만, 자칫 시야가 좁아질 수 있고, 애초에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해석이 한 번 투영된 것이기 때문에 시작점 자체가 통찰(=관찰과 고찰의 과정을 거친 디자이너의 해석)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더 높은 차원의 통찰, 즉 더 좋은 디자인을 위해서는 성찰적 보기가 필요할 것이다.
하라켄야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창조물은 내가 낳은 자식 같은 것이어서, 과보호로 애지중지하는 것보다 독립해 혼자 걷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더 기쁜가 보다.' 내 디자인을 그저 애지중지 지켜보기보다는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찰적 디자인이 아닐까.
나는 오늘 작업한 것들을 한번 더 보러 가야겠다.
이미지 출처 - Anne Freier
참고 도서 - 하라켄야, 포스터를 훔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