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연대기
지나고 보면 깨닫는 것들이 있다. 무엇이 소중했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과거의 순간이 뇌리를 스치며 후회를 남긴다. 무려 10년 전 일이 또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후회보다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때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깨달으며 그 어린 소녀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다.
가족과 함께 살던 16살의 나는 원래 살던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연립주택에 살게 되었다. 탐탁지 않던 그 집은 가세가 기울어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방 두 개, 화장실 하나가 있는 월세방이었다. 내가 그 집을 싫어했던 이유는 기억에 없어 낯설던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2층에 주인아저씨와 주인아주머니가 살았는데 그분들이 친절한 편이 아니었다. 도어락이 아닌 열쇠로 대문을 열어야 했고 엘레베이터가 아닌 계단 몇 개를 내려가야 했고 분리수거장이나 주차장이 없는 주택에 정이 붙지 않았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주택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돈에 떠밀려 이사를 해야 했던 상황이 싫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주택에 대한 반감이 마음속에 일렁인다.
16살 중학생까지 나는 피아노를 참 좋아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한, 하루의 필수 일정이었다. 그런데도 가기 싫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날에도 캐리어를 끌고 피아노 학원을 갔던 기억이 난다.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피아노를 치러 갔던 아이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수학여행 버스에서 내려서 잠깐 고민했던 순간은 기억난다. "평일이니 피아노 학원이 열려있을 테고, 마칠 시간보다 조금 남았으니 난 학원에 가야겠다"
생각해보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온전히 나의 의지였다. 우리 엄마는 나를 인형놀이하듯이 이것저것 가르쳤다. 안짱다리를 고치라며 발레 학원에 밀어 넣었고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며 논술학원에 날 데려갔다. 결국 그 논술학원이 책을 좋아하던 내게 책의 흥미를 떨어뜨리게 만들었지만..
7살 때의 유일한 기억이 피아노를 치던 것이다. 멜로디언으로 무언가를 연주하다가, 내 차례가 오면 선생님 옆에 앉아 진짜 피아노를 눌러봤다. 그 날 집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피아노 학원에 보내달라고 징징거렸다. 그때 했던 엄마의 말이 똑똑히 기억난다. "초등학교 입학하면 보내줄게" 나는 이 말만 믿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기다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날 피아노 학원에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고, 내가 먼저 학원을 요청했다. 왜 안 보내주냐, 초등학생 되면 보내준다고 하지 않았냐. 제법 당돌하고 똑 부러지게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원하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요구했던 배움이었고, 가장 오래, 가장 지치지 않고 즐겁게 이어갔던 장르였다.
매년 피아노 대회에 출전하고 상을 간간이 타 오던 나를 보고 내 부모님은 생각이 많아졌나 보다. 마침 처음으로 주택에서 살던 그때 그러니까 우리 집 가세가 가장 기울던 때, 피아노에 대한 의지가 강한 나를 보고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예체능의 길을 가는 자식에게 투자할 돈이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 무엇보다 우리 집은 촌스러운 사람들이었기에 피아노를 배우면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니가 피아노를 배우면 뭐가 될 거야, 피아니스트라도 될 거냐"라고 다그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예술고등학교 입학을 지망하던 나는 찢어져가는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 사이를 보며, 손이 작아 까져버린 엄지 바깥쪽을 보며 재능은 없고 가난만 있는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어중간하게 해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매주 최소 10시간 동안 피아노를 치던 나는 한 주에 3시간도 피아노 앞에 앉지 않게 되었다. 그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1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