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에게 내 첫인상에 대해서 물어보면 대체로 '차가워보였다'고 말한다. 초반에 낯을 가리는 성격 때문에 그래보였을 수 있겠다.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식당 사장님은 조금 친해지고 나서 내게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면접 볼 땐 서울 깍쟁이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같이 지내보니 수더분한 시골 선머슴 같다고. 대체로 내 첫인상이 친근하진 않은 모양인데, 지내다보면 그 선입견을 깨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나보다.
첫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르신들을 데리고 마을회관에서 강사 초청 강연 준비를 해야 했다. 증빙서류를 꾸려야 해서 사진이 필요 했는데 어르신들이 제각기 앉아 있어서 사진 구도가 잡히지 않았다. 같이 출장 나온 사람과 서로 눈치만 보다가, 이대로 가다간 퇴근이 늦어질 것 같아 결국 내가 나섰다. 할아버지 할머니 뻘 되시는 분들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요구하기 껄끄럽긴 했으나, 최대한 공손하고 상냥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 우리 사진 잘 찍어야 서류도 멋지게 꾸리고 지원금 받을 수 있으니까 강연하는 동안에 모여 앉아 보실게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젊은 아가씨가 당돌하게 나서 공손하게 부탁하니 다들 허허 웃으시면서 요구대로 모여서 앉아 주셨다. 강연도 깔끔하게 진행되었다. 강연 후에는 어르신들이 직접 담근 탁주도 받아 마시며 맛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평소에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주시는 음식은 되도록 다 먹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동료가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는데 오늘 좀 달라보이네요'라고 했다. 당연하지, 나도 그 날 처음 나서본 것이다! 내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지 몰랐고, 단지 무사히 퇴근을 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나를 이끌었을 뿐이다. 속으로는 나도 놀랐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사실, 여러가지 면들 모두 공존하는 내 모습이다. 냉정하고 단호한 면도 있고, 장난기 넘치는 면도 있고, 낯 가리는 면도 있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면도 있고, 꼼꼼하고 치밀하게 일하는 면도 있고, 허둥대고 실수하는 면도 있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면이 두드러질 뿐이다. 때로는 어떤 상황에 놓이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럴 땐 '내가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싶다.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없던 성격이 살면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원래 가지고 있던 성격이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볼 때는 항상 어떤 한가지 측면으로 규정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규정하려는 습성을 아예 버릴 수는 없겠지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누군가를 판단하면, 나중에는 '실망이다'가 된다. 심할 경우엔 그 사람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실망이다'라는 말로 크게 상처받은 적이 있다. 평소와 다른 면이 튀어나오기까지의 상황과 맥락은 통째로 편집되고 '알고보니 별로인 애'가 되어버린 것이다. 제일 괴로웠던 건 나마저 내가 별로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했을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을 만한 상황이었고, 나도 그렇게 행동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그렇다고 내가 별로인 사람인 것도 아니고, 내게 실망했다고 말했던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때가 있었고, 그런 면이 드러났을 뿐이다. '내가 진짜 별로인 사람인가봐' '그 사람은 나한테 왜 그랬지?'라는 괴로운 생각들에서 벗어나니 사람들이 좀 다르게 보였다.
내 인생에서 각박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항상 뭔가를 고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강박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고정관념들이 내 삶을 옭아매던 때 말이다. 지금 학년 쯤 됐으면 이 정도 스펙은 있어야 하고, 이 정도 학력이면 이 정도 직장은 가져야 하고, 이만큼 노력했으면 이 만큼은 이루어야 하고……. 만약 내가 생각하던 바를 다 이루었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아마 또 다른 관념을 들먹이며 새로운 압박의 틀 속에서 나를 착즙하고 있었을 것 같다.
내가 나를 옭아메었던 만큼 나도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지금은 안 그러지만 '휴학 하지 말고 빨리 졸업하는 게 낫지 않아?' '취업하려면 이 정도 스펙은 만들어야 하지 않아?' '쟤는 좋은 직장 다니니까 말로는 힘들다고 해도 행복한 거야' '몇 살 까지는 그래도 취직하는 게 좋은데' 등.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는 없었을까? 좀 다르게 생각해볼 순 없었을까?
요즘 나는 여러가지 삶의 방식을 관찰하고 있다. 이때까지 나는 도시에 나가서 회사생활을 하면서 때에 맞는 구색을 갖추어 살아가는 모습만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삶은 생각보다 더 역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좀 색다른 방식에도 눈을 돌려보려 한다. '이만큼 살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병든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의외의 면모들은 순간을 다채롭게 한다. 고정적이지 않고 항상 유동적이다. 예상을 깨고 새로운 면을 발견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때 삶이 풍성해진다고 생각한다. 틀을 깨고 넓게 바라보면 속도와 집중력은 다소 떨어질 수 있겠으나, 색다른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가나 저렇게 가나 중요한 건, 계속 살아가려 한다는 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