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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Feb 18. 2022

한 부부, 두 화가; 박래현과 김기창

[넛 02]

  부부는 어떻게 불리나? 보통 남편과 그의 아내라고 불릴 것이다. 그들이 화가일 때도 마찬가지다. '청각 장애를 가진 천재 화가' 운보 김기창을 열성적으로 뒷바라지한 '아내' 박래현. 그들의 관계는 그저 남편과 아내인가? 우리는 그들을 그저 천재 화가인 남편과 그를 뒷바라지한 아내라는 관계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가?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사회적 역할은 쇠사슬처럼 우리를 옭아매어 이따금 관계를 단면적으로만 보게 만든다. 우리는 아내라면 '응당'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하고, 이를 수행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 '못된 아내'라고 생각하게끔 교육받았고, 여자가 결혼하면 그의 이름보다는 00의 아내, 00의 엄마로 불리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결혼을 하더라도 수식어가 붙지 않은 자신의 이름을 유지하며 오히려 타인에게 자신을 수식어로 붙이는 권력을 누린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박래현의 이름이 낯설다면, 이는 어쩌면 여전히 김기창의 아내로 기억되고 있는 탓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천재 화가 김기창의 아내 박래현도 아닌, 부부 김기창과 박래현도 아닌, 화가로서 함께 오랫동안 작업해온 두 화가라는 새로운 관계성으로 박래현과 김기창을 살펴보려 한다. 그들이 함께 작업해 오면서 서로 주고받은 영향들을 작품을 통해 살펴보고 이후 화가 박래현이 걸어온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 활동에 대해 알아보며 글을 마치려 한다.


 우향 박래현(1920~1976)은 1944년 동경여자 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해 1943년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고 1947년 김기창과 결혼한 뒤 매년 부부 전을 개최하며 열성적으로 작업에 임한다. 그들은 함께 작업하면서 서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일련의 사회적 분위기에 동승하며 서로의 작품에서 비슷한 경향을 보이게 된다.

박래현, 노점, 1956 / 김기창, 노점3, 1953-55

 먼저 두 화가 모두 이전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해방 이후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색채가 많이 빠지고 옅게 칠하는 담채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해방 후에 일본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본색을 지워야 한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색이 진한 일본화 느낌의 작품들을 지양하는 사회적 흐름에 따라 나타난 변화로 보인다. 따라서 두 화가 모두 이를 용인해 진하고 화려한 색채를 여러 번 칠하는 것이 아니라 색채를 담백하게 표현하려 했다.

  또한 왜색을 지양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한국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당대 화가들의 공통적인 목적에 따라 두 화가도 다양한 경향을 탐구하면서 형태의 단순화, 면분할을 시도했다. 김기창의 <노점3>를 보면 지붕이나 창문의 형태를 분할해 색을 다르게 쓰고 있고, 박래현의 <노점>에서도 건물을 조각조각 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형태의 단순화나 면분할이란 단어를 들으면 아마 피카소와 입체주의가 떠오를 것이다. 실제로 이런 경향은 박래현이 피카소와 입체파에 관심을 가지고 피카소를 통해 형태적인 면을 탐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박래현의 <노점>을 보면 검정선을 덧대거나 빈 공간을 두고, 아프리카 조각처럼 인물들의 피부색을 어둡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김기창의 <노점3>보다  더 피카소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듯하다.

  이처럼 두 화가 모두 50년대의 새로운 한국화라는 목표에 따라 주제적인 면에서는 한국적인 현실을 화면에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일하는 여성들이 많이 나타나고, 형태적인 면에 있어서는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된 형태와 면분할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박래현과 김기창은 1950년대에는 비슷한 경향을 추구하다 이후 추상화를 탐구하며 점점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한다. 1961 백양회의 동남아 순회전과 1967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하며 영감을 받아 박래현과 김기창 모두 완전한 추상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김기창은 얼마 가지 않아 추상이 아닌 작품도 다시 그리기 시작하지만, 박래현은 혁신적인 시도들을 거듭하며 추상화를 다양한 형태로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

박래현, 작품, 1966, 태피스트리 / 김기창, 태양을 먹은 새, 1968


   김기창의 <태양을 먹은 새>는 1960년대 그가 시도한 추상 표현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며 영감을 받아 강렬한 필선과 먹의 농담에 집중해 붉은색과 노란색을 강조한 작품이 돋보인다.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기창은 다시 구상회화로 돌아와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한다.

  박래현은 64년부터 시작한 미국과 중남미 여행을 계기로 직물 공예인 태피스트리 작업에 몰두한다. 그의 작품은 고도의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세련된 느낌이 가득하다. 검정과 흰색, 갈색을 섞어 수묵담채화 같은 느낌이 나지만 마냥 동양스럽지만도 않다. 이는 태피스트리 자체가 동양적 재료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오묘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듯하다. 박래현 작가의 말을 보면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동양화라는 것보다는 한 회화로서 동양인의 체취를 간직한 작품을 모색하였다."


  즉 종이에 먹과 채색 가루로 그리는 동양화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동양인이 그린 회화에서의 동양화를 추구했던 박래현은 그의 의도대로 작품을 세련된 현대적인 한국화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그는 신문, 밧줄, 벽지와 같은 외부 오브제를 화면에 가지고 오면서 추상회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박래현, 기억(Recollection), 1970-73, 에칭, 애쿼틴트/ 박래현, 시간의 회상, 1970-73, 에칭, 애쿼틴트

  그 뒤에는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 판화에 매진해 다양한 판화기법을 탐구했고, 애쿼틴트, 에칭 등의 동판화 기법을 중심으로 한 1969년부터의 작품들은 그의 국제성과 유연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동판을 잘라 사물이나 역사적 이미지를 채워 넣거나 신문기사 또는 보도사진 등을 집어넣고, 하수구 마개 오브제까지 들어가는 팝아트 작업까지 섭렵해 끊임없이 자신의 작업 영역을 넓혀간다. 1947년 귀국 후에는 동양화에 서구의 판화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만의 전위적인 기법을 보여준다.


  내가 비록 그림을 업으로 삼아 그린 적은 없지만 화풍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가 정말 어려울 것이란 생각만은 단번에 든다. 지금 당장 내가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영감을 받아 내가 써왔던 글의 방식을 바꾸라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데 이렇게나 다양하고 혁신적인 시도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기법과 영역을 구축하고 확장해 나간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박래현 작가는 이 과정을 수 없이 행했고,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고 이를 일평생 공부해 나갔다는 점은 정말 그의 화가로서의 열정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박래현의 다양하고 혁신적인 시도와 이를 통해 태어난 뛰어난 작품들을 보고 나면 여느 역사에 이름을 남긴 한국 현대 작가들보다 유연성이나 국제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능가한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이는 그가 마땅히 누렸어야 할 인정과 관심이었고, 우리가 이제야 발견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김기창의 아내 박래현이라는 틀에 갇힌 관계성에서 벗어나 화가 박래현이라는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부부 화가'라는 사회적 관계에 갇혀 박래현과 김기창을 해석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사회가 부여한 종속성에 눈이 가려져 서로 간의 영향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대등한 화가 두 명'으로 바라보며 관계의 변화가 작품 해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번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길 내심 바라본다.


*참고

https://www.gokams.or.kr/visual-art/art-terms/glossary/group_view.asp?idx=227 백양회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966194.html#csidx72dce3113c452179b8e68a18b6d9d3e ‘김기창의 부인’ 박래현에 대한 편견을 씻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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