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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희 Aug 02. 2018

생각날까봐 버렸어

근데 버렸는데도 생각나서 후회해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5학년. 새학기 때였는지 어느 정도 반 친구들과 많이 친해지고 난 후인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시기의 내 짝꿍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가 컸고 예뻤다. 반면에 나는 키 순서대로 서면 항상 첫 번째였다. 때문에 짝꿍과 방과 후에 같이 길을 다니면 어른들은 우리를 언니 동생사이로 오해하는 경우가 잦았다.
 

우리 집에 처음으로 그 친구를 데려간 날, 우리 엄마는 정말 친구가 맞냐며 나보다 언니 같다고, 정말 예쁘게 생겼다며 칭찬했다. "크면 미스코리아 해도 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난 전혀 질투하지 않았다. 옆에서 엄마의 말에 맞장구 쳤다. 핑크색 옷 덕분인지 그날따라 더 예뻐 보였던 친구를 자랑스럽게 쳐다보며 이런 애가 내 친구라니'라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그 친구가 날 서운하게 할 때도 있었다. 내가 교과서를 챙겨가지 않았던 적이 있다. 당황한 내가 선생님께 말하니, 선생님은 짝꿍과 같이 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보여주기 싫다며 혼자 책을 봤다. 기분이 상한 나는 "선생님. 얘가 같이 안 봐요!"라고 일러버렸다. 내가 파마인지 염색인지 어쨌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자마자 같이 다니던 학원으로 간 날에, 친구는 내 머리에서 미용실 약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난다고 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그 친구의 표정이 너무 구렸다. 삐져버린 나는 “그럼 약 바르고 한 건데 약 냄새 안 나겠냐?”고 말하며 째려봤다.


날 기쁘게 해줄 때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가정불화로 인해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 얘기를 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지만 혼자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버거웠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친구는 그런 나를 보곤 공감해주며 같이 울었다. 내가 힘든 걸 알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고마웠다. 우리는 자주 놀이터에 가서 서로의 얘기를 하며 울기도, 웃기도 했다.


학교에서 경시대회까지는 아니고 쪽지시험을 친 날의 일이다. 시험지엔 익숙한 문제들이 가득했지만 정답을 적지는 못했다. ‘이거 학원에서 분명히 배운 건데 어떻게 푸는거지? 나영이는 잘 풀고 있나?’ 라는 생각으로 그 친구를 바라봤다. 역시 끼리끼리다. 친구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동지애를 느꼈다. 나는 몰래 말을 걸었다. “야, 나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도.” “어떡하지? 이거 틀리면 손바닥 맞잖아. 진짜 싫은데.”


우리 둘 중, 누구의 서랍에서 꺼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책상에 붙어있는 서랍에서 교과서를 살짝 꺼내 베끼기 시작했다. 우리는 몰래 키득키득 거렸다. 그렇게 다 베끼고는 손바닥 안 맞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다. 베끼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애가 선생님한테 일렀으니까. 이후에 맞았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진짜 나쁜 놈이네. 자기는 수학 잘하면서 그냥 모르는 척 좀 해주지. 쪼잔한 새끼”라고 생각하며 그 친구를 째려봤던 기억은 선명하다.


우리는 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같은 학원을 다녔다. 어느 날은, 내가 학원을 옮기겠다고 말했더니 나영이도 나와 같은 학원으로 옮겼다. 옮긴 학원은 수학 한 과목만 가르치는 곳이었다. 학원이지만 우리에겐 놀이터이자 안식처였다. 공부를 하지 않았다. 수학 점수도 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즐거웠다.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집안에서의 스트레스를 수학 학원에 가서 해소하고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이 행복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나영이가 갑자기 전학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놀이터였던 학원도 그만둔다는 말과 함께. 서러웠다. 미웠다.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하필 집에서 무슨 일이 있는 날, 나영이의 위로가 필요한 날 그런 소식을 전하는 건지. 전학을 가는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나영이는 육상부가 있는 학교로 가서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안 가면 안 되냐며 잡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참았다. 하지만 눈물은 참지 못했다.


초록색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나영이가 낯설었다. 왠지 모르게 같이 입었던 회색 교복보다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 미웠다. 짜증났다. 왜 우리가 함께 입었던 교복을 더 이상 입지 않고, 왜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으며, 왜 더 이상 학교 끝나고 떠들 수가 없는지. 이럴 거였으면서 왜 나랑 같은 학원으로 옮겼던 건지. 하지만 싸우진 않았다. 진심으로 미운 건 아니었으니까. 내 친구의 꿈을 응원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렇게 나영이는 추억 속의 친구가 되었다.


대학생 때, 우리는 다시 연락이 닿았다. 나영이는 바라던 대로 체대에 입학했다. 기특했다. ‘나영이도 날 그리워할까? 별 다른 생각이 없겠지’라는 마음으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거절당할까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나영이는 내게 먼저 만나자고 했다. 만남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우리는 초등학생 때처럼 다시 가까워졌다.


나영이를 다시 자주 만나게 됐던 시기는 대학교 친구들이 내게 등을 돌렸던 때였다. 그래서 참 힘들었다. 불안해서 심장은 쿵쿵거렸고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조심스럽게 나영이에게 나의 상황에 대해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나영이는 등 돌린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고 나의 옆에 남아있는 친구를 생각하라고 했다. 생각은 쉬웠지만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힘든 조언이었다.


하지만 나영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점점 밝아졌다. 우리는 함께 강릉 바다로 떠났고, 시계 박물관도 구경했다. 그 박물관엔 각각 다른 색종이에 ‘이 공간은 뽀뽀해도 반칙이 아닙니다. 옆 사람을 잠깐이라도 안아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 너무 더워 땀이 뻘뻘 났지만 시계 박물관은 나름 시원했다. 그 안에 있던 액자처럼 뚫어놓은 창문으로는 너무나도 청량해서 뛰어들고 싶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었다. 행복했다. 내가 힘들어하니 바로 바다로 데려가주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다. 이후에도 우리는 가깝게 지냈다. 오해가 생기기 전까진.


나영이는 나의 졸업 작품의 모델이었다. 촬영을 하던 날, 나는 나영이의 눈에 핫핑크색 섀도우를 칠했다. 참 잘 어울렸다. 촬영을 끝내고 우리는 명동으로 향했다. 명동에서 지나가던 남자가 나영이의 번호를 물어봤다.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렇게 나영이는 그 남자와 만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영이가 그 남자 때문에 울었던 적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난 제발 그만 만나라고 했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그 남자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해버렸다. 하지만 나영이는 계속해서 그 남자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멀어졌다. 누구 하나 화내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렇게.


더 이상 얼굴 볼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을 쯤, 나영이는 내게 연락을 했다. 그동안 준비하던 대회에 나간다고. 난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무시해버렸다. 이후에도 여러 번 나영이에게 연락이 왔지만 난 답장을 하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나 내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지 않고 나영이에게 연락을 했다. 참 차가웠다. 내가 알던 친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답이 왔다. 이 연락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4년 간 그 누구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나영이가 내 전 연인도 아닌데 염탐을 참 많이 했다. 페이스북도 들어가보고 카톡 프로필도 훔쳐보고 인스타도 보곤 했다. 질척거렸다. 그래도 난 연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한다는 말을 4년째 지키지 않는 나영이가 미웠으니까. 또 연락했다가 무시당할까봐 무서웠으니까.


연락을 하지 않으면서도 나영이가 내게 줬던 저금통은 갖고 있었다. 고양이의 손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고양이가 동전을 가지고 들어가는 저금통이었다. 하지만 연락을 하지 않은지 3년 정도가 지났을 때 가지고 있어서 뭐하냐는 생각으로 내다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그저 불필요한 물건을 버린 느낌이었다. 그 저금통이 생각난 적도 없었다. 나영이가 내게 줬던 저금통 자리는 새로운 돼지 저금통이 차지했다.


같은 동네 주민인데도 나영이와 연락하지 않았던 4년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나영이의 뒷모습을 봤다. 그때 나는 다른 친구와 우리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참 오랜만이었지만 나는 뒷모습을 보자마자 나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내 친구에게 “쟤 나영이네”라고 말했다. 친구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 뒷모습만 보고 확신하냐며. 그렇게 친구는 나영이가 맞는지 확인해 보겠다며 다가갔다. 역시나 나영이가 맞았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나는 눈을 돌려버렸다. 심장은 쿵쿵거렸고 만나면 안 될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 당황했다. 참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는데 인사도 못하는 사이가 됐다는 게 서글펐다. 하지만 티내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다가 나물무침이 들어있던 유리통을 깼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치우지 말라고 본인이 치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무장갑을 끼곤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던 그 나물무침과 산산 조각이 난 유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나물을 사서 씻고 손질하고 양념을 만들며 고생했을 이모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엄마에게 우리가 다 먹었다고 이모에게 이야기하자고 했다. 갑자기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고무장갑을 낀 채로 주저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에게 우는 모습을 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감정에 복받쳐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없는 것 같은 존재가 됐다. 글을 쓰는 것도, 사진을 찍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갑자기 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나영이가 보고 싶었다.


내 핸드폰엔 나영이의 연락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영이 인스타에 들어가 한참을 고민했다. 결심을 한 후 난 옆으로 긴 직사각형의 파란색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메시지를 보냈다. 누구냐는 답장이 돌아왔다. 복희라고, 잘 지내고 있냐고, 그때는 내가 미안했다며 사과했다. 내가 고민했던 시간이 아까울 만큼 나영이는 자기가 더 미안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연락처가 없으니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4년 반 만에 다시 카톡으로 대화를 하게 됐다. 알고 보니 나영이도 내 프로필 사진을 자주 눌러봤다고 했다. 예전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는 동네에서 만났다. 어제 만났던 친구 같았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다시 예전의 관계처럼 가까워졌다. 나영이가 사귀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하며 슬퍼하면, 나는 울며 나영이를 쳐다봤다. 나영이는 내게 울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너나 울지마”하며 휴지를 찾았다. 나영이의 고민은 대부분 전 남자친구였다.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와 너무 비슷해서 마음이 쓰였다.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도 잘 아니까 내가 대신 그 남자를 찾아가서 패주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 나영이는 어느 정도는 그 남자를 정리했다.


이번엔 내가 문제였다. 인간관계로 고민이 많았던 나는 나영이에게 사실대로 털어놨다. 새벽에 나영이의 집 앞에서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두 시였다. 샤워하고 나오니 나영이가 보낸 카톡이 있었다. ‘마음이 여려서 그래.’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갑자기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고양이 저금통이 보고 싶어졌다.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버렸던 과거의 나를 쥐어박아버리고 싶었다. 우리의 추억을 함부로 버린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 일었다. 겨우 몇 글자로 ‘그때 선물해줬던 저금통 버렸는데 후회해’라고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노트북을 켰다. 그러곤 그때의 고양이 모양 저금통을 함부로 버려서 미안하다는 감정을 실어 이 글을 썼다. 나영이는 내가 그 저금통을 함부로 버렸다며 절대 원망하지 않을 걸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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