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환이는 여행을 갈 때면 침대 위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동안 밀린 잠이라도 몰아 자듯 일어날 생각을 도통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복희도 포기했는지 혼자 핸드폰 화면만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여행지에 있어야 할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만지던 것도 지쳤는지 그녀는 혼자 신발장 쪽으로 걸어 나갔다. 슬리퍼를 신고 나간 그녀는 괜히 죄 없는 모래알만 걷어찼다. 오늘 하루를 곱씹었다.
복희와 주환은 동네에서 만나 지하철을 타고 신촌역으로 향했다. 신촌역에 도착한 둘은 맥도널드에 들어갔다. 아침을 해결한 후, 예약한 펜션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꼼꼼하게 알아본 건 이번에도 역시 복희였다. 버스를 기다리며 그녀는 주환에게 이런저런 말을 많이 걸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녀가 아닌 핸드폰 화면에 있는 게임 캐릭터였다. 성의 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마음이 상해버린 복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버스에 올라타서도 마찬가지였다. 길드전인지 뭔지 빠지면 길드원에게 피해를 끼치는 거라며 주환은 계속 게임을 했다. 그에겐 옆에 있는 그녀보다 얼굴도 모르는 길드원이 더 중요해 보였다. 몇 시간이 흘러 도착한 펜션에서도 그녀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아 입실할 수 없으니 대기공간에서 조금만 기다리라는 펜션 주인의 말에 큰 공간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적막을 깬 건 복희였다. 펜션 앞마당을 구경하러 나가자는 말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
펜션 앞에 있는 흔들의자에 함께 앉았다. 복희는 핸드폰을 꺼내 같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주환은 이번에도 비협조적이었다. 그녀가 하자는 건 모든 귀찮은 듯 언제까지 사진을 찍을거냐며 이제 그만 좀 찍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 싸우기 싫은 마음에 그에게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건넨 핸드폰을 받아 든 그는 그녀의 앞에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졌다. 이번에도 그의 태도는 대충이었다. 말 그대로 그는 사진을 찍었다. 복희를 예쁘게 담아주려곤 하지 않았다. 마치 셔터를 누르는 기계 같았다. 주환의 손에 있던 핸드폰을 넘겨받은 복희는 사진을 보고는 또 한 번 서운해졌다. 왜 이렇게 성의 없게 찍냐고 물어봤지만 그의 태도는 오히려 더 당당했다. 그녀는 또 한 번 입을 다물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둘은 청소를 마친 숙소로 들어갔다. 복희는 장을 봐 온 것들을 바로 냉장고에 넣었다. 주환은 침대 위로 바로 안착해 게임을 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하루를 다 곱씹은 그녀는 다시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옆에 누웠다. 잠이 깬 그는 복희를 더듬었다. 화가 날대로 난 그녀는 만지지 말라고 하곤 냉정하게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 말을 못 들을 수가 없는 거리였는데도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곤 계속해서 더듬었다. 복희는 결국 소리를 질렀다.
"너 진짜 뭐 하는 거야? 싫다니까? 만지지 말라고 말했잖아"
"나는 만지고 싶은데?"
"만지고 싶어도 내가 싫어. 만지지 마. 여행 와서 여태까지 잠만 자다가 일어나자마자 나 만지는 게 정상이야?"
"왜 만지면 안 되는데? 내가 여자 친구 만지지도 못해? 그럼 내가 너랑 왜 사귀는데?"
"무슨 말이 그래? 그럼 너는 나랑 이 짓거리하려고 사귀는 거야?"
"응"
"뭐라고?"
"맞다고. 이러려고 너 만나는 것도 있어"
"너 진짜 말 막 한다. 나는 오늘 여행 와서 너 자는 것만 계속해서 기다리고 기다렸어. 최소한 일어났으면 나한테 어디라도 나가자고 하든가 아니면 놀자고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너 내가 짜증 내지 말랬지. 또 짜증이네. 야 나랑 안 할 거면 헤어져"
"헤어지자고? 너 진짜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나 여자 친구 맞아?"
화가 난 복희는 침대에서 내려와 식탁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주환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 발코니 문을 열곤 담배를 피워댔다.
"야, 담배 꺼. 냄새 너무 싫으니까"
"닥쳐 미친년아"
"너 또 욕하냐? 진짜 지겹다.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뭔데? 이거 네가 잘못한 거잖아. 그런데 넌 왜 매번 당당하고 나를 죄인 취급하는 거야? 내가 너랑 하기 싫은 게 내 잘못이야? 싫으면 너도 안 하면 되잖아 왜 굳이 계속 만지는데?"
"야, 김복희. 내가 너랑 자지도 못할 거면 너랑 왜 만나냐? 나는 내 말 잘 드는 여자가 좋다니까? 너 내 말 잘 들을 거라며 그래서 만나는 건데 네가 내 말 듣는 게 뭐야?"
"그럼 넌 나 좋아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거야? 진짜 말 너무 막 한다. 너 이럴 때마다 나 상처 받는 건 생각 안 해?"
담배를 다 피우자마자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주환은 식탁 앞에 있던 의자를 침대 쪽으로 끌고 와 앉았다. 그러곤 복희에게 앞으로 오라고 화를 냈다.
"야, 너 이리로 와"
"싫어. 너랑 가까이 있기도 싫어"
"말 들어라. 너 안 오면 갈 거야"
이 말 끝에 주환은 3, 2, 1을 붙이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0이 나올 때까지도 주환의 앞으로 가지 않은 복희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주환은 가방을 챙기곤 나갈 준비를 했다. 복희는 이 밤에 어디를 가냐며 그를 붙잡았다. 그는 그녀를 세게 밀었다. 아팠는지 그녀의 입에선 비명이 새 나왔지만 그를 놔주진 않았다. 다시 가 그의 옷깃을 움켜 잡았다.
"이 밤에 어딜 간다는 건데. 그럼 난 여기 혼자 있으라는 거야?"
"네가 내 말 안 들었잖아. 내가 분명 오라고 했는데 네가 안 왔어"
"이게 대화야? 왜 너는 항상 이런 식으로 행동해? 네가 왕이야? 그만 좀 해. 그리고 너 이렇게 가면 난 여기서 혼자 뭐해? 나 무서우니까 가지 마"
"그건 니 알아서 하세요"
계속해서 안 놔주는 그녀를 주환은 때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그런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더니 다시 아까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어이없는 요구를 했다.
"무릎 꿇어"
"싫어"
"꿇으라고 했어"
"싫다고 했어"
"그럼 나 갈게. 너도 알아서 서울 가"
"진짜 뭐 하는 거야?"
"그럼 무릎 꿇으라고. 미친년아. 짜증 나게 하지 마라"
무릎을 꿇으라는 기가 차는 요구에 응하지 않던 복희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이후엔 폭언이 쏟아졌다.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은 날카로운 칼이 돼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그녀의 가슴에선 투명한 피가 흘렀다. 더 이상 따지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도 주환은 폭언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에게 제대로 사과하라며 큰 소리를 냈다.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그의 말대로 했다. 그의 앞에서도 침대 위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