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을의 연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복희 Aug 24. 2022

을의 연애 17

달지 않은 화이트데이

3월 14일. 화이트데이. 사탕을 선물하며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는 날. 하지만 복희에겐 아니었다. 그날은 다섯 번째 화이트데이 었다. 다시 한번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희가 주환을 만나며 맞이한 화이트데이가 다섯 번째였다는 말이다. 바보같이 미련한 복희는 네 번이나 사탕의 사자도 구경하지 못했지만 이번마저도 미련 가득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했다. 


화이트데이가 되기 몇 달 전, 복희는 주환에게 이제 그만 만나자고 말했지만 깔끔하게 헤어지진 못했다. 이별을 말할 용기는 생겼으나 제대로 끝을 볼 용기는 없었다. 레퍼토리는 똑같았다. 주환이는 이제 자기가 직업이 생겼으니 좋은 곳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고, 기념일도 잘 챙겨주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녀를 만나며 찐 살을 꼭 빼겠다고 약속했다. 이번엔 진짜겠지라고 생각하며 붙잡혔다. 그렇게 또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


달라진 건 없었다. 주환의 몸무게는 그대로였고 좋은 곳엔 발 한 번도 들이밀지 못했다. 기념일은 무슨. 좋아야 될 날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복희는 모든 감정이 평소보다 열 배로 치솟는다. 통제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게 열 배가 된 날이 바로 다섯 번째 화이트데이 었다. 그동안 복희는 화이트데이에 사탕 좀 사달라고 네 번이나 말했는데 다섯 번째 화이트데이에 빈 손으로 걸어오는 주환의 모습에 복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네 번이지 4년이잖아 4년. 


심지어 만나기 전에 주환이에게 일이 늦게 끝날 것 같다며 다음에 보자는 문자까지 받았었다. 복희가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냐며 늦으면 늦는 대로 만나면 되지 만나지 말자는 거냐고 따졌다. 그제야 그가 생각이 짧았다며 원래대로 만나자고 해서 만난 거였다. 그런데 빈 손이라니.


"근데 오늘 갑자기 못 만난다고 한 건 뭐야?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아니 일이 늦게 끝날것 같으니까 그런 거지."

"그럼 늦게라도 보면 되는 거지. 약속 다 해놓고 갑자기 안 본다고 하면 내가 기분이 나쁘잖아."

"아 그래서 만났잖아. 시비 좀 걸지 마."

"난 이제 좀 신기해. 이렇게까지 화이트데이에 집착하는 나도 신기하고 이렇게 집착을 해도 츄파춥스 하나 안 사 오는 너도 짜증 나고. 심지어 우리가 오늘 저녁 먹는 곳은 동네 만두집이야."

"동네 만두집이 뭐?"

"여기가 후졌다는 게 아니고 단, 한 번을 좋은 데 가자고 찾아보지도 데려가지도 않는 네 태도가 열이 받는 거야."

"아 그만 좀 해."


사실 그곳은 복희가 좋아하는 식당이었다. 바오쯔라는 식당인데 그녀의 말로는 홍콩에서 맛보았던 딤섬보다 맛있다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죄 없는 그곳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분명 똑같은 맛인데 맛있다는 말 한마디가 오가지 않았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내려놓곤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사탕으로 왈가왈부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대화가 통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식당을 떠나자마자 복희는 사탕을 도마 위에 올렸다. 


"오늘 뭐 가져온 거 없어?"

"없는데?"

"너 진짜 대단하다. 이쯤 되면 일부러 그러는 거지?"

"또 뭘 일부러 그러는 거야? 제발 그만 좀 해."

"아니 내가 4년 동안 말했잖아 사탕 좀 사달라고. 오늘 다섯 번째야. 뭐 느끼는 거 없냐?"

"사탕이 그렇게 좋아?"

"사탕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나 사탕 사 먹을 돈 없는 것도 아니야. 다른 여자애들은 다 남자 친구한테 사탕 받는데 왜 나만 너를 만나서 이렇게 살아야 돼? 진짜 지긋지긋해."

"아 그럼 그런 남자 만나. 사탕 사주는 남자 만나면 되잖아. 복희야."

"그래. 그럴게."


주환이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았던 복희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그와 다른 길로 걸었다. 그러곤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던 중 그녀 친오빠의 친구인 은상에게 카톡이 왔다. 대화방을 눌러보니 파리바게트에서 교환할 수 있는 기프티콘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하지만 썩 반갑지는 않았다. 줬으면 하는 사람은 주지도 않는 사탕을 이렇게 쉽게 받을 수 있다니. 그 사탕은 그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유리병에 든 연두색 사탕. 아마 사과맛 아니면 포도맛이겠지. 초라해도 어떠냐는 마음으로 집 주변에 있는 파리바게트에 들어가 사탕을 교환했다. 오빠 친구에게 고맙다는 답도 보냈다.


사실 복희는 그날 은상이에게만 사탕을 받은 게 아니었다. 회사 동료들이 복희가 홍일점이라고 사탕과 초콜릿을 챙겨줬었다. 동료들과 은상이에게 받은 사탕과 초콜릿을 내려놓으니 화가 더 치솟았다. 연인이 아닌 사람들도 챙겨주는걸 4년 동안 무시하는 사람이 그녀의 남자 친구라니. 더 이상 주환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사랑하면 이럴 수가 없어. 그동안 내가 멍청했던 거야. 사탕이 무슨 백만 원짜리도 아니고. 그래 그냥 그 새끼 말대로 그런 남자 만나면 돼.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면서 살아야 돼?' 


그녀는 혼자 마음속으로 물음표를 내밀었다가 느낌표를 눌렀다가 마침표를 찍기를 반복했다. 반복을 끝낸 그녀는 자꾸만 알람이 울리는 핸드폰을 쳐다봤다. 역시나 주환이었다. 


-너 어디야?

-집

-갑자기 왜 간 거야?

-너랑 있기 싫어서. 그리고 우리 그만 하자.

-사탕 하나 때문에 이래?

-응. 사탕 하나 때문에 이래. 그니까 헤어져.

-내가 만두 사줬잖아.

-만두? 지금 만두 사준 걸로 생색내는 거야? 야 내가 화이트데이 챙겨달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만두가 왜 나와 지금? 만두 그거 나만 먹었냐? 너도 먹었잖아.

-아 그냥 만두 사주지 말고 사탕 사줄 걸 그랬네.

-야 계좌 불러 돈 보내줄게.

-자존심 부리지 마 복희야.

-아니 자존심 아니야. 더러워서 돈 보내줄게. 계좌 불러

-우리은행 100* *** ****** 31500원.

-응 보냈어 확인해봐~ 그리고 두 번 다신 연락하지 마

-와 너 진짜 대단하다. 돈 진짜 보냈네? 네가 지금 사과하면 안 헤어질게.

-아 개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진짜 연락하지 마. 미친 새끼야. 아 진짜 시간 아까워 죽겠네.

-아니 복희야. 너 진짜 왜 그래? 무슨 사탕 하나 가지고 헤어지자 그래? 정신 좀 차려. 내가 잘하겠다고 했잖아. 도대체 왜 사탕 가지고 시비를 걸어? 왜 그래?

-그래 나 사탕에 미친년이야. 그니까 연락하지 마.

-사탕 하나 안 사준 걸로 이렇게 까지 될 일이야?

-응


몇 월 며칠 어느 식당에서 얼마를 냈는지 적혀있는 사진이 왔다. 주환이 직접 노트를 찢은 종이에 펜으로 하나씩 옮겨 적은 사진이었다. 합계는 대략 백만 원 정도.

-야 그럼 이것도 보내. 나 그동안 너한테 쓴 돈 너무 아까워.

-병신ㅋㅋㅋㅋㅋㅋㅋ 꺼져 그냥

-보내라니까? 안 보내면 너 경찰에 신고한다?

-응 해.

 

주환의 밑바닥까지 보게 된 복희는 기가 찼다. 저런 놈을 성인 되고 처음으로 만났다니.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또다시 연락해 용서를 빌었다. 딱 그녀만큼만 답답하고 힘들어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주환과 똑같이 행동했다. 처음엔 복수하는 것 같고 재밌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뭐 하고 있는 짓인가라는 생각에 정말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을의 연애 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