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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16. 2022

타인의 고통 - 수전 손택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오래 전에 읽었던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다시 읽었다. 이 책 이외에 수전 손택의 책은 '해석에 반대한다'와 희곡 '앨리스 인 베드' 정도만 읽었던 것 같다. 세 책 모두 이해가 쉬운 편은 아니었지만 단편적 글을 모았던 해석에 반대한다가 비교적 읽기 쉽고 와닿았던 것 같다. 희곡인 '앨리스 인 베드'는 어디선가 마주친 너무 힘이 들어가 관념적 세계로 빠져 버린 것 같다는 말에 동의가 되면서도 동시에 독특한 스타일로 여성성 혹은 여성적 현실의 역사를 펼쳐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등장 인물로 인한 태생적 자폐적 분위기가 텍스트 위에서 여러 방식으로 뻗어나는 점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번역은 읽기 힘들다. 문장의 뉘앙스를 통해 주장을 확연하게 보여주면서 독자들을 끌고 가는 것이 일반적인 글쓰기일 텐데, 수전 손택은 문단이나 챕터 마다 명시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지시하지 않고 두루두루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영어 원문을 읽을 수 있었다면 둘러가는 이야기들에 담긴 주장의 강약을 확인하면서 읽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은 헤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책의 분량이 그리 긴 편도 아니고 수전 손택이 하고자 하는 말도 명확한 것 같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미지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키고 그 작용 안에서 일어나는 비윤리적 요소와 대안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선 손택은 사진이라는 형식의 특수성부터 면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부터 저널리즘의 형태로 전달되기 시작한 전쟁 사진은 그림을 포함한 '서사'와 대조적으로 충분한 설명을 담고 있지 못하다. 사진에 담겨 있는 잔혹한 현실을 누가 일으킨 것이며, 사진의 장면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이 사진에서는 소거되어 있다. 그래서 정확하다고 생각했던 명시적 정보들까지도 뒤바뀌는 일들이 일어난다. 가해 국가나 피해 국가나 사진 속 끔찍한 사건이 자신들의 피해 사실이라고 둔갑시키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이오지마 섬에서의 국기 게양 - 조 로젠탈


서사와 다른 사진의 또 한 가지 특성은 실제가 어떠하든 간에 사람들이 사진이라는 매체를 현실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작자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그림이나 글과 달리 사진은 사진가가 그 시간, 그 장소에 함께 주재하면서 셔터를 작동해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쟁의 참화를 그대로 목격했다해서 유명해진 사진들을 훑어 보면 시체를 옮기고, 구도를 조정하고, 상황을 연출했었던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손택이 예시로 보여주는 사진 중에 조 로젠탈의 이오 섬에서의 국기 게양이라거나 로베르 두아노의 시청 앞에서의 입맞춤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미지들인데, 이렇게 유명한 사진들이 조작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그만큼 우리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당시의 진실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렘 캠프의 난민들, 1984 -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실 사실가는 예술에서의 창작자와 거의 동일한 일들을 수행한다. 더 나은 구도를 확인하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주제를 강화하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사진에 담긴 피사체를 어떤 시선으로 보아야할지까지 결정한다.  손택의 예시 중에서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이주: 이행 중의 인류'에 관한 이야기는 통렬하다. 이주민의 불행을 아름답게 묘사하며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 작가의 사진들은 단순히 보기 좋고 인상적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사진에 담긴 이주민들을 곤란하고 초라하고 남루한 대상으로만 묘사함으로써 대상의 고유성과 상황들은 뭉개져버린다. 상황과 맥락, 정치적 요구는 연민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사진 안팎에서 작용하고 있는 권력의 관계와 이데올로기는 은폐돼 버린다. 그래서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무력해져버린다. 우리가 그 사람들과 무관하며 안전한 이곳과 달리 어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차리고 연민하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연민이 타인의 불행을 추상화시키고 우리와 무관한 그러므로 나의 무고함을 증명해주는 뻔뻔한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수전 손택은 계속해서 사진이 아닌 매체 주로 과거 그림들에서 전쟁과 고통이 어떻게 묘사되고 전달되었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예술이 잔혹한 것에 대한 호기심, 관음적 쾌감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 숭고를 통해 연결되는 것, 그리고 창작자의 해석에 대해 고민하고 잔혹성의 현실 앞에서 엄숙해지는 것은 주관을 배제한 듯 구경꾼이 되어 참혹한 현실을 전시하는 사진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진은 끔찍한 고통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며,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사건들에 연민만을 느끼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일까? 예술과 사진의 작용을 대조하면서 수전 손택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고민과 사색의 여지인 듯싶다. 충격적인 사진 앞에서 우리는 맥락과 배경을 따져묻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데 하나의 장면과 단편적인 정보만을 전달하는 이미지 앞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는 이미지 제프 월의 죽은 군대는 말한다에 대한 손택의 설명들은 우리가 사진이 갖고 있는 순진성 혹은 순전성의 판타지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사진이 그곳의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판타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 한 장으로 그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 단순한 이미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는 태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압도되어 무력함에 떨어지지 않고 우리와 유관한 그들의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에 대해 숙고하고 애도하는 일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사진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될지에 대해 내내 의문이 일었다. 동영상 플랫폼이 아직 활성화 되기 전, TV에서 온갖 뉴스와 영상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는 하나의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매체가 전달하는 정보가 단 하나의 사진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일이 흔했지만 지금은 양상이 좀 달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장의 사진 이미지가 우리에게 주는 힘이 전과 같지 않다. 사진을 보고나면 영상을 통해서 자세한 정보를 찾아 보는 일이 지금은 자연스럽다. 그런 면에서 과거에 지식인들이 대중을 판단했던 평가가 여전히 유효한지도 다시 생각해봐야할 듯하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한 장의 사진에 압도되어 행동을 멈추지는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색과 숙고는 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에게 물어야 할 능력과 태도의 문제가 된 것 같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어떤 특정 매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타인을 염두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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