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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20. 2022

[리뷰]나의 아름다고 추한 몸에게, 김소민

연결되는 몸들을 위해


몽덕이와 함께 살고 있는 글쓰기 노동자 김소민의 책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를 읽었다. 추한 몸이라고 해서 외모와 몸에 대한 강박이나 사회적 편견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몸,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몸까지 두루 다룬다.


중심에는 물론 저자가 처한 환경, 자신의 몸이 놓인다. 1인 가구, 프리랜서, 40대 중반 여성으로서의 몸이다. 몸과 몸의 권력 관계에서는 주변부일 수 있는 저자의 몸은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 머물지 않고 다른 몸들을 살핀다. 장애인, 거식증 여성, 노동자, 산업재해 당사자의 가족, 가사노동자 등이다.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의 몸이 처한 상황과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면서 다다를 수 없는 몸에 대해 공감과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의 감정을 전하기도 하며 우리가 생각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떤 사회적 소수자들을 불러낼 때, 자신의 주장을 위해 레퍼런스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제 존재와 목소리를 함께 실었다는 점이 특히 좋았던 것 같다. 전직 기자라는 작가의 배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다른 몸들을 위한 다정한 손짓이나 제스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마지막 챕터, 반려견 몽덕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공감하고자 노력해도 닿지 못하거나, 저항하고자 해도 부족한, 권력과 이해가 얽힌 인간의 몸과 달리 반려 동물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또 몸으로 말을 걸어온다. 애틋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들도 쉽게 넘길 수 없었던 것 같다. 비건이 되려는 생각은 아직까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책을 덮고 나서는 조금 고민하게 됐다. 외식을 제외하고만이라도 육식을 멀리할 수 없을까.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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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회의는 약자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저주다. "너무 예민한가?" "너무 감정적인가?" 억울한 마음이 들끓을 때도 그 기분이 정당한지 타인의 의견ㅇ르 묻는다. 누가 기준일까? 자신을 믿지 못하면 결정해야 할 순간에 뒷걸음질 치게 된다.

 나와 아홉살 소녀에게 스민 폄하의 악취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빼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소녀가 개를 또 쫓아오면 미국 부통령 당선자 카멜라 해리스의 승리 연설 동영상을 같이 보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이 단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ㅇ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100번 같이 돌려 듣고 싶다. 한 인간으로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때까지. 100번 돌려 듣자고 하면... 소녀가 몽덕이와 나를 슬슬 피하겠구나. (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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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스티그마'에서 "(부정적 고정관념이 붙은 '낙인자들'은) 바깥 사회의 기준을 내면화해 다른 사람들이 그의 결점으로 보는 것에 상당히 민감하게 신경 쓰도록 훈련된다"며 "그는 자신이 갖추어야 할 것을 결핍했다는 데 동의하고 마는데 이때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고 썼다. '아줌마'는 어느새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사랑, 열정, 패기, 도전, 희망 같은 낱말은 '젊음'과 짝패를 이룬다. 내 욕망은 그대로인데, 나랑은 자꾸 멀어지는 것만 같은 낱말들이다. (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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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행복곡선의 바닥을 찍고 나서 '생산'의 몸에서 '공감'의 몸으로 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몸으로부터 숨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없으리라."(마사 누스바움,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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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권은 편안함이다. 너무 자연스러워 특권을 누리는 게 느껴지지도 않아야 일상적 특권이다. 피부색, 성별, 가난 탓에 자기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매 순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자기 시선, 그 자기 시선을 회의하는 또 다른 자기 시선, 이 모든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다. 그 시선들의 투쟁이 일어나는 복잡한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묻는다. '그걸 왜 못 해?' '왜 그렇게 꼬였어?'(1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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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해준 밥을 먹고, 누군가 지은 집에 살면서 돈만 벌면 의존하지 않는 건 줄 알았다. 모두가 의존하는데 어떤 몸의 의존만 의존이라 손가락질 당한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돼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구마가야 신이치로 일본 도쿄대학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 부교구 '경향신문' 인터뷰 재인용)

 어떤 몸을 내쫓는 곳에선 모두 불안하다. 모른 척, 아닌 척해도 사실 다들 안다. 사람은 워래 취약하다는 걸 말이다. 효율성 높은 몸이 기준인 곳에서 사람은 취약함을 떠올리게 하는 타인뿐 아니라 자기 안의 약함도 없애버리려 자신을 쥐어짠다. 자신의 약함을 없애버리고 싶을수록 약한 타인이 혐오스럽다.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건 순 거짓말이고, 효율성 떨어지는 몸이 되는 순간 '비인간'으로 취급되는 곳에서는 약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으로 살 수 없다. 나는 늙어가는 게 정말이지 두려운데 시간은 자비가 없다. 발달장애인 이상분 씨는 서울시 탈시설 정책에 따라 15년 동안 살던 시설을 나와 '나, 함께 산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설 가래, 니네는. 어떤 할아버지는 나한테. 도,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만 있으래. 그래서 화났어. 약한 사람이 살(수 있으)면 (그 사회는 누구나) 다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왜 없어지라고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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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기 안에 담을 쌓고 있잖아요. 방어기제를 쌓죠. 동시에 감정과 감각의 억압이 생겨요.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맞닿아 있죠. 사람, 사물과 상호작용하며 자기 안의 방어기제를 넘어 원래 자기와 연결돼보는 거예요. 그러려면 존재만으로 환영받고 환대받는 장이 필요해요. 정말 이 생명체에 엄청나게 복잡하고 심오한 원리가 있다는 걸 발견하면 누구라도 존중받을 존재가 돼요.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 연민을 느낄 수 있어요. 그렇게 사람과 맞닿게 되는 거 같아요. 생존이 아니라 살맛나게 사는 삶을 위해 타인과 함께할 수 있는 일상의 가장 작은 실천을 공유하려는 거예요."(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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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사람들은 원래 인간이 취약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상기시킨다. 통제 가능한 몸을 효율적으로 써서 독립적인 존재로 쭉 산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의존한다. 그래서 심장마비와 암을 앓은 아서 프랭크는 "아픈 사람들은 이미 아픔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썼다. 그는 아픈 동안 몸의 경이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고통은 삶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이며 자신은 작지만 세상에 연결된 존재라고 느낀다. (1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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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봄은 행동이고 실천이고 수행이다. 우리 안의 인간애를 온전하게 깨닫게 하는 실존적 행위이다. (...) 돌봄은 사회를 하나로 잇는 보이지 않는 접착제다."(1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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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희경 등은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책임이자 권리인 돌봄을 시민으로서 정의롭게 나눠야 한다고 제안한다. 헌신ㅇ르 당연시하지 않고 서로 개별성을 알아봐주는 돌봄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지려면 공공의 역할을 늘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동시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논의는 윤리적이지 않을뿐더러 유의미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전희경의 글에서)(188-1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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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현은 '장애학의 도전'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에 대가가 주어지는 게 노동 규범인데 이제는 대가가 곧 가치가 됐다고 썼다. 그 책에 이런 연구 결과가 나온다. 2009년 영국 신경제재단 소속 연구원들이 분석해보니, 월급 1만 3000만 파운드를 받는 보육 노동자는 임금 1파운드당 7~9.5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만들지만 연간 소득 50만~1000만 파운드를 받는 투자 은행가는 임근 1파운드당 7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파괴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한 동창이 우스개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집에 갔더니 엄마가 나보고 나물을 무치래. 나 같은 고급 인력한테.'

 그 동창이 외국계 기업에서 공동체를 위해 무슨 가치를 생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물을 무치면 여러 사람이 한 끼는 먹을 수 있다.(1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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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소한다. 그래서' 다음에 '행동한다'가 나올 수 있다는 걸 그를 보고 처음 알았다. '내가 세상을 바꿀 거야'라고 했다가 나이 들고 정반대 편에 선 사람들을 많이 봤다. 변절했으면서도 변절한지도 모르는 그들이 젊은 시절 독재정권과 맹렬히 싸웠던 동력은 어쩌면 비대한 자아상이 아니었을까. 한 사람이 사는 세상은 그 사람이 공감각하는 고통의 경계까지다. (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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