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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Optimist Oct 01. 2024

영화 <해야 할 일>을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영화내용 일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영화감상에는 큰 영향이 있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독립영화도 종종 찾아보지만, 그렇다고 영화제 출품작까지 챙겨 보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영화, <해야 할 일>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것을 보고 개봉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려 왔어요. 어벤져스도 이렇게 기다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건 제가 소위 인삿밥을 먹는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제게는 근 몇 년간 가장 인상적이고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네요. 다만, 많은 사람의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걱정도 듭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영화가 특징적인 것은 두 가지인데, HR의 업무과정과 거기서의 갈등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점, 그리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던지기보다는 그 상황의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시놉시스대로, 경영상 어려움으로 구조조정을 시행해야하는 조선회사 주니어 인사담당자의 모습을 뒤쫓습니다. 시놉시스부터 상당히 특징적이죠? 갑작스럽게 구조조정 오더가 내려오고, 계획을 세우고, 이해관계자들 만나서 협의하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얼굴을 붉힐 일도 여럿 겪게 되죠. 일상이나 회사 밖 삶에도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회의하는 장면에서 저는 오늘 휴일인데 잠깐 출근을 했나? 싶을 정도였어요. 


이런 오더가 내려오면 HR 안에서도 당연히 크든 작든 논쟁은 일어납니다만, 경영진 결정을 바꿀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이 과정의 논쟁이래봐야, 일어나면서 '아이구' 하는 추임새 내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만큼 의미가 없다는 거죠. (이견은 있겠지만, 법적으로는)회사 주인인 주주들이 하라는데, 안 하면 어쩌겠어요.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할 수 밖에요. 도망가든지요. 


이런 업무 과정은 상당히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다니는 회사 이름부터가 H중공업을 연상케 하고, 2000-10년대 한참 노사분규로 말이 많았던 조선업계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정리해고 대상자 선정 기준을 세우는 과정, 그리고 거기서 하나씩 나오는 보이스들과 위에서 계속 바뀌는 의사결정 때문에 이미 근로자대표와 협의된 기준을 틀거나 본의 아니게 면담대상을 속이게 되는 상황 등등, 꼭 정리해고가 아니더라도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인사 담당자 분들께는 상당히 현실적으로 와닿는 과정이리라 생각됩니다. 


인사팀에 새로 배치된 인원에게 <채용부터 퇴직까지 법률지식> 책과 단체협약서부터 쥐어주는 것, 사무실에 붙어있는 산안법 법령요지 표지를 보며 소품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도 느껴지더군요.




조지 클루니가 주연했던 <인 디 에어>같은 영화도 있었고 결은 조금 다르지만 노동문제를 다룬 <송곳>같은 작품도 있었습니다만, 노동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은 아무래도 메시지가 선명해지게 마련입니다. 일을 시작하고 다시 찾아 본 <송곳>은 여전히 균형감 있고 객관적이지만, 동시에 상당히 뜨거운 작품이더군요.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는 회고적입니다.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한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라는 등의 메시지를 전하기 보다는, 2010년대 조선업 구조조정 당시, 인사 일을 하던 사람들은 이랬었답니다. 라는 걸 기록하고 싶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충분치 않다고 느낄 수도 있고, 인사팀 출신 감독의 자기연민적 회고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제게는 이런 구성이 오히려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개인들은 조금은 평면적이고 밋밋하다는 느낌인데, 대신 이 현장에 있었을 법한 사람들이 각자의 상당히 선명한 역할을 갖고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사람이 이야기하기 보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입장을 돌아가면서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컨대, 이 영화 속 인사팀장이 구조조정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구성원 설명회에서 구성원들에게 보이는 것과, 팀 내에서 팀원들을 설득할 때, 경영지원 본부장에게 자기 의견을 밝힐 때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게 모순적으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이죠. 이 팀장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입장을 보여주고, "전졸"(전문대 졸업) 출신 인사팀 대리, 월급루팡 만년 부장, 이리 저리 살 길 찾는 자재팀 과장 등등 회사 안에 있을 법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각자 입장을 순서대로 보여 줄 뿐입니다. 심지어는 주인공의 예비신부까지도요.




간혹 너무 문어체인 대사가 섞여있거나, 캐릭터의 감정이 확 급발진하는 몇몇 장면들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근로자 분들의 입장을 조금 더 조명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명하는 작품들이 이미 많아 인사담당자들에게 조금 더 집중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다가, '나는 내가 부끄럽게 만드는 일을 하게 될 때는 퇴직을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대신, 지탄을 받는 일일 지라도 그것이 진정 필요하다는 걸 내가 납득할 수 있다면 나는 할 것이다.' 라는 말을 리더님과 면담자리에서 했던 게 기억이 났습니다. 그 때의 저는 참 호기로웠군요. 


일을 하다 보면 종종 '대체 이 의사결정은 얼마나 책임감 있게 내려진 건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대체로는 자기들 회사 자기들이 말아먹겠다는데, 어쩌겠어. 라는 생각을 합니다만, 그 의사결정으로 인해 저 조차도 부끄러운 일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같이 하게 되는데요.


최소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책임감 아래 사업상 의사결정들이 진행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노측 또한 마찬가지이구요.


이 영화를 재밌게 보셨다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라는 책을 함께 추천합니다. 거제도 조선산업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균형감과 현장감있게 기록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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