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한지 세 달이 넘어가는 시점에도 '속았다'는 생각이 문뜩문뜩 들어 마음을 괴롭혔다. 유럽계 회사라더니.. 워라벨을 중시한다더니.. 스타트업의 장점만 갖춘 회사라더니!! 외국계 기업 지사에서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를 누려왔던 내게, 성장지표나 이벤트 일정뿐 아니라 윗분의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회사 분위기와 업무 목표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여기서 일하는 유럽인 동료들은 워라벨의 '워'밖에 모르는 사람들 인 듯했다. 게다가 밤이고 주말이고 울리는 업무 카톡. 나는 스타트업 라이프에 마지못해 적응해가면서도 마음 한편에 선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용감하게도 막연한 환상만 품은 채 스타트업에 발을 들여놓았고, 나의 기준과는 달랐던 현실에 적응하길 거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호기롭게 퇴사를 했느냐고?
어쩌다 보니 당혹스러움 속에서 시작한 나의 스타트업 생활은 이제 1년을 훌쩍 넘어 2년을 채워가고 있다. 퇴근길 친구들에게 침을 튀어 가며 그 날 있었던 어이없고 황당한 사건들을 늘어놓았고 그럴 때면 도대체 어떤 회사를 다니고 있는 거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지만, 내심 그 속에서 희열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업무 속에 지루함과 권태를 느끼는 것보단 머리를 띵 하게 하는 동료들과 빵빵 터지는 사건들 속에서 일하는 것이 낫다. 애초에 '스타트업의 역동적인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던 나의 바람이 이렇게 이루어진지도 모르겠다.
'역동적이다'라는 표현에는 여러 주어가 붙을 수 있다. 회사의 성장과정이 역동적일 수 있고, 팀 규모의 성장, 누군가의 퇴사와 입사로 인해 회사의 분위기 역시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 스타트업 내에서는 개개인의 역할마저도 짧은 기간 내에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 이 변화의 소용돌이는 역설적으로 내가 회사 밖으로 휩쓸려가지 않고 버티게 해 준 일등공신이 아닌가 싶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루함을 버티는 것보단 변화에 적응하고 변화를 만드느라 바빠서 지루할 틈이 없는 게 낫다.
스타트업 마치 갓 태어난 작은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갓난아기는 매일의 성장이 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성장한다. 수많은 울음과 웃음과 질문과 혼란과, 그리고 깨달음과 애정 속에서 인격을 형성해 나간다. 어느 날 우연히 겪게 되는 하나의 사건이 아기의 기억에 깊이 새겨지기도 하고 한 사람의 존재가 아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회사 역시 마치 아기처럼 살아있는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타트업은 신규 고객 확보를 위해, 투자 유치를 위해, Product Market Fit 달성을 위해 우리는 쉴 틈 없이 고민하고, 실험하고, 도전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을 확충하기 위해 새로운 팀원들이 대거 채용되고, 어떤 이들과는 안타깝게도 미처 친해질 기회도 없이 작별을 고해야 한다. 구성원들이 바뀌면서 회사의 문화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바뀌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팀 규모가 커지면서 할 말을 잃게 될 정도로 어이없는 일들이 발생하는 빈도는 적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발언하고 행동한다. 회사가 성장한 만큼 구성원들에게 돌아오는 혜택과 복지도 생겼다. 복지라고는 잘생긴 외국인 동료의 얼굴과 기럭지 뿐이었던 회사인데. 이젠 칼퇴근에 자유로운 재택근무, 거기에 소소한 물질적인 복지 혜택까지 더해졌다. 물론 소소하지 않고 대대적인 복지혜택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이 역시 회사의 호의를 기대할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몫이다.
[스타텁러 탄생기] 시리즈에서는 내가 회사에 입사했을 시기의 갓 태어난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은 각종 에피소드들과 깨달음들에 대해 개인적인 관점에서 써 내려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