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영어로 사람 구실 하게 되기까지
나는 영어를 정말로 못하는 학생이었다.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입학시험으로 모든 학생들이 TEPS라는 영어 시험을 봐야 했는데, 그때 내 점수가 990점 만점에 400점 정도였다. 당시 귀찮아서 한 번호로 몰아 찍고 잠을 잤던 친구가 300점을 받았으니.. 정말 처참한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발생했다.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영어 원서를 읽어야 했고, 시험과 과제 역시 영어로 출제되었으며 몇몇 교수님은 아예 영어로 강의하시기도 했다. 가뜩이나 공대 전공 수업은 한국어로 들어도 이해하기 힘든데, 영어라는 문제도 더해져 수업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웃픈 에피소드로 시험을 볼 때 영어로 쓰인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조교님께 문제가 무슨 뜻인지 몇 번이나 물어보기도 했다. (조교님 죄송합니다..ㅠ)
위기감을 느낀 나는 영어를 잘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고,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지금은 그나마 영어가 장애물이 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입학시험에서 굴욕을 맛보았던 텝스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보았고, 이제는 영어로 쓰인 논문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주변 착한 친구들로부터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들어보기도 했다.
인터넷에 영어를 잘하기 위한 방법론은 넘쳐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의지가 약한 사람인지라 영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 시도했던 모든 방법들이 나에게 효과가 있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지속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정체기를 겪던 중 나의 영어 공부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을 겪게 되는데, 바로 빅보카라는 단어장을 알게 된 것이다.
나의 경우 영어 단어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문법 공부를 열심히 한들 단어 자체를 모르니 영어로 쓰인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도 이 문제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시중에서 유명하다는 단어장을 구입해 단어를 외우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그 다짐이 3일을 가지 못했다. 몇 달 지나고 이번엔 진짜 열심히 해보자며 뒤쪽부터 외워보자 했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빅보카라는 단어장은 뭔가 달랐다! 이런 의지 흙수저인 내가 단어를 모두 외웠으니 말이다.
빅보카는 철저하게 우선순위에 기반을 둔 단어장이다. 영어로 쓰인 글들을 모아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들을 추려내고, 구글의 Ngram Viewer를 통해 우선순위를 검증하여 영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8000개의 단어를 얻어냈다고 한다. 영어와 빅데이터의 만남이라니! 뭔가 공학 냄새가 나는 영단어장이라 왠지 모르게 더 눈길이 갔다. 실제로 빅보카의 첫 단어는 the이다. 빅보카를 제외하고 the가 들어간 단어장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내가 빅보카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구체적인 수치가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빅보카의 8000개 단어를 모두 외우면 90%의 사용 빈도에 해당하는 단어를 다 알게 된다고 주장하며 멱법칙 그래프를 그 증거로 들고 있는데, 철저한 데이터와 검증을 보며 공대생으로서 저자 분이 정말로 공학 박사가 맞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져 더 신뢰가 갔다. 이 8000개의 단어만 외우고 단어장은 이제 그만 보자는 생각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나는 빅보카 외우기에 돌입했다.
처음 며칠은 순조로웠다. 초반 단어들은 정말 많이 사용되고 쉬운 단어들이라 대부분이 아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2000번대를 넘어가자 슬슬 모르는 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4000번대를 넘어가자 아는 단어들이 거의 없었다. 갈수록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하루에 200개씩 꾸역꾸역 외웠다. 단어를 외우는데만 하루에 3~4시간이 걸렸다. 6000번대가 넘어가면서부터는 하루에 200개씩 외우면 머리가 터져버릴 거 같아서 100개로 줄여서 외웠다.
결국 고생 끝에 8000개 단어를 모두 외웠고, 내 단어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테스트해본 결과 성공한 미국 30대 비즈니스맨 수준으로 나왔다. 이제 어디 가서 영어 단어 몰라서 글 못 읽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단어를 한 번 외운다고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이후에도 몇 번 더 빅보카를 외웠고, 지금도 매일 단어 100개씩 복습하며 내 것으로 완전히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단어를 다 외우고 나자 하루빨리 영어로 된 글을 읽고 싶어 졌다. 정말로 8000개의 단어가 90%의 사용 빈도에 해당하는 단어를 커버하는지 궁금했다. 단어를 외운 것만으로 영어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텝스 시험에 다시 응시해보았다. 텝스 시험은 Listening(듣기), Grammer(문법), Voca(단어), Reading(독해) 네 파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voca 영역은 단어가 어렵기로 유명하다. 예전 같았으면 뒷 문제로 갈수록 단어가 어려워 보기에 있는 단어를 거의 다 몰랐을 텐데, 빅보카를 외우고 나니 문제의 보기 4개 중에서 3개 정도는 아는 단어들이어서 무리 없이 답을 고를 수 있었고, 위 텝스 성적표에서 볼 수 있듯이 voca 영역에서는 99점 만점에 85점 이상을 항상 받았다. 리딩에서도 모르는 단어의 수가 현저하게 줄다 보니 독해 속도도 빨라지고 더 잘 읽을 수 있었다.
빅보카라는 임계점을 넘기고 나의 영어 실력은 한 단계 성장했다. 아는 단어가 많아지다 보니 영어로 된 텍스트를 읽는 것이 재밌어졌고, 읽는 도중에 빅보카에서 외운 단어를 만나면 반가웠고 기억에 더 오래 남았다. 하지만 단어는 영어의 기본이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단어를 많이 외운다고 영어를 갑자기 엄청 잘하게 되지는 않았다. 나의 경우 리딩은 이제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리스닝, 스피킹, 라이팅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에는 여러 소스를 통해 끊임없이 영어를 접하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영어 자료 중에 좋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를 추천하고자 한다.
1. Economist Espresso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서 매일 아침 에스프레소처럼 그 날의 주요 뉴스들의 핵심만을 농축하여 짧게 제공해주는 App이다.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들은 길이가 긴 편이라 읽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데, 이 app에서는 한 문단 정도로 필요한 내용만 뉴스를 제공해주어 출퇴근 시간에 간단간단하게 읽기 좋으면서도 이코노미스트만의 고급진 영어를 접할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보통 평일에는 세계 정치, 경제 등의 뉴스가 나오고 토요일에 문화, 예술 쪽의 뉴스가 제공되는 것 같다. 종종 나오는 한국에 관련된 뉴스를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방탄소년단이 컴백을 해서 그런지 방탄소년단에 관련된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2. 네이티브 영어 표현력 사전 (이창수 저)
요즘에 굉장히 꽂혀 있는 영어 책이다. 우리가 한국말을 영어로 표현할 때 쉽게 범하기 쉬운 콩글리쉬의 예를 보여주고 어떻게 해야 영어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친절한 설명을 통해 알려준다. 이 책의 저자분이 통번역 전문가이셔서 그런지 책에서 굉장한 내공이 느껴진다. 며칠 전부터 이 책에 나온 네이티브 영문장들을 암기하고 있는데 책에 나온 모든 영문장을 암기했을 때 영어 실력이 얼마나 향상될지 가늠이 안 갈 정도로 정말 좋은 책인 것 같다.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아직도 영어 실력이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외국인 앞에서 아직도 어버버한 나 자신을 보면서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으니깐 이 정도라도 말하지.. 하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미래에 유창하게 외국인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