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꼭 어른스러워야 할까요? 진지해야 할까요?
나는 자주 어리광을 피우고 싶습니다. 어릴적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이유없이 툭툭 말을 던지고 싶기도 합니다.
“엄마, 내 귀걸이 못봤어? 저번에 여기 있었는데 안보이잖아.”
그러면 엄마는 괜히 투덜대는 나를 보고는 “저 저, 왜 또 저래?”라고 하고는 했죠.
그러고 보니, 엄마도 내 기분을 살폈군요. 나는 늘 내가 먼저 엄마의 기분을 살핀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적엔 정말 그랬으니까요. 우리집은 부모님까지 일곱 대가족에서 살았어요. 엄마는 새벽 일찍부터 힘들게 온 가족의 아침밥을 준비했죠.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정말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됩니다. 그런데 그때는 엄마의 힘듦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저 아침부터 일어나라고 욕을 섞어가며 소리치던 성깔 사나운 엄마만 보였으니까요. 모든 엄마들이 나의 엄마같지는 않다며 친구네 집 엄마들과 비교했어요. 그러고보니 나는 엄마를 잘 몰랐네요.
아무튼 어릴 적, 나는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가장 꼴찌로 기상했어요. 이불을 개는 엄마와 언니 사이에서 멍하게 앉아 있곤 했죠.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불개기는 큰언니 담당이었어요. 아무나 아무렇게나 신성한 이불을 갤 수 없었거든요. 제 첫 책에도 언급했지만 이불의 모서리는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져야 합니다. 실패하면 욕을 먹고, 처음부터 다시 개야 하거든요. 큰언니가 고생이 많았죠. 이불이 잘 개어지고, 방바닥이 먼지 하나 없이 반짝반짝 빛나면 그날은 그래도 좀 편안한 날이었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말끔하게 정리가 될 때까지 엄마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엄마의 기분과 표정, 목소리를 살폈죠.
그러던 내가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말을 툭툭 던집니다. 이유는 편한 사이이기 때문이도 했지만 엄마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자만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죠.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엄마의 비밀을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기서 엄마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비밀은 그냥 두고 싶습니다. 엄마도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 있을테니까요.
엄마의 비밀은 엄마에게는 약점이었지만 나에게는 강점이었죠.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랬어요. 나는 배알이 꼴릴 때마다 엄마의 약점을 이용했죠. 비겁한 딸이었죠. 말투에 부러 짜증을 넣어 건네면 엄마는 당연히 받아주어야 했어요. 엄마는 어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봤죠.
그러고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에게 그러셨죠.
“뭘 그렇게 바빠서 난리야. 난 못봤어. 그리고 너 미리미리 준비를 했어야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속으로 쳇!하며 나는 말대꾸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부릴 수 있는 어리광이었거든요. 엄마에게 괜히 짜증을 내서 미안한데 사실 그건 너무도 기분 후련한 일이었어요. 어느 순간 짜증이 사라지고 감정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요. 뭐라해도 받아주는 사랑의 존재가 있어서 일까요.
나는 엄마에게 그러하듯 가끔 아이처럼 버릇없어 지고 싶습니다. 친한 친구에게, 친분이 있는 선생님에게 괜히 “선생님~, 저 진짜 기분 별로에요. 힝!”하며 어리광을 피우죠. 그러면 또 선생님이 그럽니다. “아니, 왜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러면 저는 그래요. “아니요, 무슨 일이 생겼다기 보다는 그냥 그래요.” 그러고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미주알 고주알. 선생님은 사실 내가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걸 아실까요?
그 일은 꼭 필요할 일 같아 보입니다. 감정 흘려보내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엄마나 친한 선생님같이 나늘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주는 대상이 없다면 혼자라도 하면 어떨까요. 가령 침대에서 빈둥거리며 잠을 자든, 핸드폰을 보든, 잠시 그렇게 나와 놀아주는 것이죠. 가끔인데 뭐 어떤가요. 그렇게 어리광 부리는 나를 보듬어 주는 일. 너무 편안하고 안심되지 않나요? 다시 아이가 되어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해보세요. 무엇이든 좋은 생각만 해야하고, 좋은 말만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보세요. 나의 감정을 알아주고, 잠시 놀아주면 부정적이고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지니까요. 우리 가끔 어린아이 같아 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