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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Oct 11. 2020

좌충우돌 우도 여행기 02

어제의 기억을 답습하며 걷고, 만끽하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께서 내려주시는 드립 커피 한 잔과 따끈한 보말죽을 한 그릇 먹고, 추천해주신 식당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우도에는 뿔소라가 유명한데, 뿔소라 물회를 먹고 싶어서 간 가게는 현지 맛집이었는지 동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맛있는 점심 한 끼를 든든히 챙겨 먹고, 우도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관광객들이 끊는 5000원짜리 버스표를 끊었다. 다른 관광지는 가지 않고 이날은 머뭄 카페에서 실컷 놀다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버스표 값이 조금 아까웠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전 날 경험했던 그 더위를 절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머뭄 카페가 있는 땅콩 마을로 출발했다.







머뭄 카페로 가기 위해 땅콩마을 정거장에 내렸는데, 카페로 가려면 버스정류장에서 섬의 안 쪽으로 조금 더 걸어야 했다. 날씨가 더우니 그 짧은 거리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다행히 체력이 따라주었고 씩씩하게 카페로 향한 발걸음 앞에 멀리 동산 위의 작은 집처럼 머뭄 카페가 보이기 시작했다.

탁 트인 공간에 카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양에 해변가와는 또 다른 풍경 이서 다른 여행 장소로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걷는 걸음 사이로 풀냄새와 흙냄새, 바닷 공기가 훅 끼쳐 더운 볕 아래서도 기분이 좋았다.


카페에 도착하니 큰 창 사이로 우도의 바다와 육지 풍경이 양 쪽에 펼쳐졌다. 이따금 당일치기로 우도에 놀러 온 관광객들이 삼발이 오토바이를 타고 잠시 들렀다 한 숨 돌리고 가는 카페였다. 모르는 이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것만 같은 장소에 떡하니 있었는데도 간간히 소수그룹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다.

나를 본 사장님은 반갑게 인사해주시면서도, 신기해하셨다. 안 가봤던 관광지를 들르지 않고 굳이 또 한 번 가게에 들린 내가 신기할 법도 했다. 그리고 어제는 희한하게 사람들이 많이 왔었다며, 이 카페는 한적한 것이 매력이라고 웃어주시던 그 미소가 참 좋았다.


사장님과 몇 분 담소를 나누다 미놀타를 꺼내 들었다. 필름이 감기는 걸 몇 번을 확인한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어제의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 한번 심기일전, 미놀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 번 둘러봤던 곳이라 그런지, 어제는 잘 보이지 않던 사진 포인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는 자동차에 가려있던 해바라기 밭과, 소품들을 발견했다. 부끄러워 찍지 않았던 포토존 앞에서도 연신 뛰어다니며 셀프 카메라를 찍어댔다. 비록 스트랩에 가리긴 했지만, 썩 맘에 드는 사진들을 만났다.







실컷 촬영하다, 목이 마르면 카페로 들어와 알쓰(알코올 쓰레기) 주제에 알코올이 들어간 모히또를 시켜 카페에 있던 책을 읽으며 홀짝거렸다. 땀이 식으면 카페 밖 테라스에 작은 데크 위에서 하염없이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며 쉬었다. 아주 조용하고, 한적했다. 끈적한 섬의 바람마저도 기분 좋았다.

한참을 앉아 있는데 데크 위 작은 창문이 열리더니, 사장님께서 기댈만한 쿠션 하나를 내려주시며, 편안히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해주셨다.

덕분에 마치 내 방이라도 되는 마냥, 우도의 풍경이 순식간에 내 것이 되는 착각 속에 몸을 뉘이고 여기저기 눈길을 주며 이런저런 생각 속에 빠졌다.







이동수단이 없는 걸 아는 사장님께서는 그날도 어디 갈 곳 있으면 태워주신다며 사양 말라고 하셨지만, 그건 너무 죄송한 일이었기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카페에서 낡은 필름 상자를 세 개 발견했다.

오래된 3M사의 감도 100짜리 스카치 필름이었는데 안에 플라스틱 통도 그대로 들어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사장님께 물었다.


"사장님, 혹시 필름 카메라 있으세요?"


"그거 남편이 예전에 사놨던 필름인데, 소품으로 거기 놔뒀어요. 하나 가지고 갈래요?"


그때만 해도 빈티지 필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던 터라,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파악도 못한 채 극구 사양했다.


"아니요 사장님. 자꾸 신세만 져서 안 그래도 죄송한데 그럴 수 없어요."


"어차피 사용 안 하는 필름이라, 하나 정도는 괜찮아요. 지영 씨가 좋은 곳에 써줘요."


그렇게 천사 같은 사장님의 배려로, 난 유통기한이 1996년까지인 오래된 필름과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남 사장님께서 잠시 가게로 오셨는데, 아주 흔쾌히 나에게 들고 가도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필름은 아끼고 아끼다가 그다음 해 여름 다시 찾았던 제주 여행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도 결국 카페 마감시간까지 카페에서 놀다가 사장님의 차를 얻어 타고, 밤수지맨드라미로 향했다.


전날의 감동과는 또 달랐던 하늘이 나를 반겼다.

책방 밖에서 실컷 지는 해를 감상하며 셔터를 눌러대다 책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창으로 비치는 노을빛이 책방 벽에 걸려 소담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가 적어 내려 갔던 글을 여기 적어보자면,





그날의 그림자는 황홀한 일몰의 자투리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아주 조그만 네모를 소박하게 빚어 나의 서툰 그늘과 함께 벽에 물들여 주었다.

이대로 이 곳에 그림자 째로 박제되어 남더라도 행복했을 것이라고,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웃음이 빛과 그림자의 틈새 사이로 세어 나왔다.


회상의 찰나 조차 행복한 공간과 벽과 그리고 세상의 것이 아닌 일몰은 나를 혼란스러운 충족감에 젖게 했다.

충분히 머리 끝까지 잠겨 찰랑거리다 원래의 뭍으로 다시 올라왔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온 맘이 그날의 붉은 바다를 다시 그리고 걷고 있다.


하늘을 덮고 누웠던, 도무지 적응되지 않던 생소한 촉감의 홍조단괴를 마음껏 밟고 다녔던, 베고 누웠던, 홀린 듯 셔터를 눌러댔던 그 날의 파도 곁 언저리를.

온전한 행복감에 젖어 느릿느릿 온 혈관이 뜬근해지던 날의 빛과 온도가 유난히 그리운 밤의 중심에서 난 온몸이 물기 하나 머금지 못하고 말라있다.




참으로 감상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우도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내 오감을 열어준 모양이었다.








다음날 아침, 어쩐지 에너지가 넘쳐흘렀던 나는 어떻게든 버스를 타지 않기로 마음먹고 숙소에서 걸어서 서빈백사까지 걸어 나갔다.







그 와중에 길치였던 나는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근처 천진항 항구까지 갔다가 출발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돌아가는 코스였다.

입고 있던 예쁜 원피스가 무색하게 땀에 젖어 다리에 척척 감기고, 아침부터 열심히 한 화장과 머리가 흘러내렸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급히 땅콩 아이스크림을 파는 어느 카페로 가서 태양을 잠시 피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우도의 땅콩은 그 콩알만 하고 쪼그만 게 어찌 그리 고소한 지, 언제나 가면 한 번 이상은 사 먹게 된다.

30분 정도 카페에 앉아있으며 한 김 땀을 식히고 나오니 살만해져서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신기한 듯 쳐다봤고, 그 외 여러 가지 이동수단에 탑승한 사람들도 한 번씩 힐끔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 그들은 나를 의아하게 보지 않았을까.


서빈백사에 겨우 도착하자마자 힘들었던 기억은 어디론가 증발해버리고, 관광코스 하나는 즐겨봐야겠다는 생각에 보트로 우도를 한 바퀴 하는 코스가 있어 호기롭게 보트 맨 앞에 올랐다가 엉덩방아를 백 번 넘게 찍어대며 소리만 꽥꽥 지르다가 허리 부상만 입고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내렸다.


아니, 힐링한다며? 쉬고 싶어서 왔다며?







결국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아픈 엉덩이를 달래 가며 하고수동항 까지 더 걸어갔다. 그 더운 땡볕 아래에서 그때의 난 참으로 젊었다. 하긴 오늘은 나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난 더 이상의 도보여행에 GG를 쳤다.

그리고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눈앞에 보이는 망고 주스 가게에 무작정 들어가 사장님도 보이지 않는 가게에 일단 앉고 봤다. 다행히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있어서 손풍기를 최대로 올리고는 망고주스를 벌컥벌컥 목 안으로 급하게 넘겼다. 이러다가 여행이 끝나기 전에 내 숨이 다할 것 같았다.


결국 얌전히 버스에 올라 삼일 째 머뭄 카페로 향했다.

이 날은 우영팟에서 체크아웃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사장님께서 다음 숙박장소로 나를 태워다 주시기로 했던 날이었다. 머뭄카페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며 안정을 취한 후, 아쉬움을 뒤로하고 땅콩 마을 초입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정류장에는 줄로 칭칭 감아놓은 라디오가 돌벽에 설치되어 있었고, 텅 빈 길가에 그저 기다리는 이들이 잠깐이나마 쉴 수 있도록 정류장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정감이 가던지. 왠지 우도와 닮은 그 장면이 너무 예뻐서 몇 번 사진을 남긴 후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서 짐을 싸서 고대하던 마지막 숙소로 사장님과 함께 이동했다.


두 번째 숙소는 우도의 홍조단괴 해변이 바로 앞에 펼쳐지는 작은 게스트 하우스였다.

부드럽고 편안한 베개와 침구, 그리고 커피 머신, 노을이 보이는 큰 창과 바로 앞에 펼쳐진 서빈백사가 멋진 곳.


현재 그 숙박시설은 문을 닫았고, 내가 그 여름의 마지막 손님이었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묵는 동안 그 숙박 시설에 묵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그 깜깜하고 칠흑 같은 우도의 밤 속에 무서워하며 잠들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숙박 기념 선물로 받은 우도 땅콩 잼과 이제 이 숙박시설의 서비스가 완전히 종료된 것이라는 예쁜 손글씨로 단정히 써 내려갔던 엽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첫날 친구네 가족과 놀았던 서빈백사가 숙소 밖으로 보였다.

커피 머신으로 커피 한 잔을 내려받고, 고단함에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깨어보니 해가 질 시간이었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맥주 한 캔을 사서 미놀타와 함께 터덜터덜 해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작은 돗자리를 펴고 자리했다.


상상만 해오던 그 장면 속에 내가 있었다.







헛웃음이 날 정도로 멋졌던 그날의 하늘은, 어떤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감동을 주었다. 분명 구름이 풍성하게 하늘에 자리 잡고 있는데, 별이 잘 보이는 맑은 하늘에 초승달이 반짝였다. 현실성 없는 하늘은 초단위로 얼굴을 바꾸며 움직이기 바빴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하늘의 따뜻하고 붉은빛의 잔영과 상냥한 해질녘의 바닷바람이 나를 지나갔다. 끊임없이 펼쳐진 하늘을 덮고 누워 하늘과 함께 붉게 물들다 서서히 잠겼던 그때를 여전히 잊을 수가 없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아름답게 지는 이 곳의 사람들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겠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랬기 때문에 그곳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피부를 태우는 건 죽도록 싫어하고, 덥고 땀이 나는 날씨를 그다지도 달가워하지 않던 내가 검게 타도 그만, 더워도 그만, 무릎이 깨져도 그만, 그저 여태까지 그곳의 잔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신기하다.

하루의 끝과 쉬는 날을 자연이 정해주는 매력적인 작은 섬이 나를 불러주었나 싶기도 하고, 어쩌다 내가 우도로 몇 박 여행을 계획하여 가고 싶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그 이유가 그리 설득력 있지 않아서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다.


중요한 사실은 이유도 모른 채 향했던 여행지가 준 커다란 벅차오름이 나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난 언젠가 또 이 곳에 이유도 모른 채 찾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


여행이란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짐을 아주 잘 싸게 되는 짐 싸기의 달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수단을 위한 행위가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한 과정 속에 가장 능동적인 경험이라는 것. 다시말해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몸짓이라는 것. 이 두 가지가 나름 정립한 여행에 대한 나름의 정의이다. 그리고 그 정의는 내가 미놀타를 사랑하는 이유와 닮아있었다.

그때의 긴 여정을 말없이 함께 해준 나의 여행 메이트 미놀타는 우도 여행 이후로 추억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여행의 동반자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채비를 하는데 아침부터 지휘자님께 연락이 왔다.


'기상악화 예보로 금일 공연 취소입니다.'


얏호!

하루 더 머물다 오라고 하늘이 도와주시는데 그럼 즐기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나는 제주 성산항으로 출발하는 배에서 출발 전 뛰다시피 나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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