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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Oct 18. 2020

좌충우돌 우도 여행기 03

덤으로 받은 하루치 여행

여름휴가를 계획할 때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일 수가 약간 짧아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합창단 동문 선배님들과 함께 활동하는 합창 모임에서 내가 계획했던 날짜의 끄트머리에 공연을 하기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주말까지 끼워서 우도에서 제대로 푹 쉬었다 오고 싶었지만, 지휘자님의 부탁으로 여행을 조금 짧게 다녀오기로 했는데 여행 내내 마음 한 구석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제주의 날씨는 이다지도 화창하건만, 아무래도 창원은 그 날 저녁에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에는 다음 날 비가 올 예정이었다.- 야외공연이었으니, 공연이 취소되는 것은 당연했다. 드레스를 입고 우산을 쓰고 공연을 할 수도 없거니와, 비싼 장비들이 비 오는 날에 야외에 깔릴 리도 없었고 아마 야외무대를 보러 와 줄 관객도 없었을 것이다.




배에서 내리기 전 찍은 우도의 바다




오 분 전 성산행 티켓을 끊어갔던 외지인이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표를 환불해달라고 하니 매표소 직원은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티켓을 끊을 때도 우도에서 3일 머물렀다는 걸 알았을 때 눈이 동그래져서는 나와 화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셨었다. 컴퓨터 전산 상에 내가 며칠에 우도로 들어왔는지 기록이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가족도 지인도 없는 우도에서 몇 박씩 머무르며 쉬어가는 관광객이 그다지 흔치는 않을 것이다. 여자 홀로는 사연 있는 사람 같기도 했을 것 같고, 왠지 청승맞아보였으려나.


나중에 매표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대부분 우도 주민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솔직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반나절만에 훑고 떠날 수 있는 여행지에서 여름 성수기 때 며칠 씩이나 일부러 머물렀다가는 일이 그다지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여행에서 무슨 효율을 따지고 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소중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일부러 먼 제주까지 온 사람들 대부분은 똑똑한 여행-시간과 노력 대비 효율성을 따졌을 때, 효율이 높을수록 똑똑한 여행이라고 생각했다.-을 할 것이다. 정답이란 없지만, 난 버리고 싶었다.

지겨울 정도로 무력했던 지난 시간들, 무언가에 짓눌러져 오던 압박감, 스스로에게 존중받지 못함을 넘어서서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던 날들, 그리고 계속해서 뭔가를 해내지 못했을 때 무기력했던 나로 얼룩진 모든 시간들. 나 자신을 돌봐주지 못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조금은 보상받기 위해 우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나를 추스르고 안아줄 수 있어 행복했다. 떠나는 발걸음이 너무 아쉬워 배 안에서 자꾸만 우도를 힐끔힐끔 곁눈질하고 있었는데, 마치 선물처럼 하루치의 여행을 덤으로 받은 것이었다.







표를 환불받고 본격적으로 다시 밟은 우도의 모습은 또 다른 색으로 빛나 보였다. 그늘 하나 없이 뜨거운 볕만 아프게 내리쬐고 있을 뿐인 작은 선착장에서 그날 도착한 그 누구보다도 벅찬 마음으로 첫날 머물렀던 숙소의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갑작스럽지만 혹시 오늘 하루 머물 방이 있나요?"








감사하게도 사장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제쳐두시고 나를 데리러 와주셨다. 우도 안에는 택시가 따로 없었고, 짐을 들고 버스를 타기에는 혼자서 힘들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당일 아침 제주로 돌아가려고 선착장으로 나서는 길도 마지막 숙소를 돌봐주시던 분께서 일부러 시간 맞춰 나를 내려주고 가셨었는데,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로 베푸는 선의를 이렇게 덥석 덥석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우도 사람들은 참 자상했다.


사장님께서는 손수 짐을 트럭에 실어주시고, 가고 싶은 곳을 물으셨다. 오늘은 숙소에서 쉬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나를 숙소에 나를 내려주시고는 바로 밭 일을 하러 나가셨다.

당시 우영팟 게스트하우스-당시에는 게스트하우스였고, 현재는 펜션으로 바뀌었다.-에는 주말에 제주에 거주하시는 여사장님께서 우도로 들어와 게하 운영을 도와주셨었는데, 그때가 주말이었기 때문에 사장님께서도 숙소에 계셨었다.-내가 도착했던 첫날에도 나의 아침 식사를 챙겨주셨던 감사한 분.-이 날도 내가 다시 하루 더 묵게 된 것을 아시고는 전화를 하셨다.


"지영씨~ 집에서 할 일도 없을 텐데, 지금 친구들이랑 깅이(작은 게) 잡으러 왔는데 여기서 물놀이하지 않을래요?"


난 잠시 고민을 하다가, 기쁜 마음으로 여사장님이 계신 비양동 해양광장으로 향했다.

비양동 해양광장으로 가기 위해서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버스가 오길래 무심코 탔다. 버스기사님께서 날 유심히 보시더니,


"아가씨, 혹시 오늘 표 끊은 게 맞습니까?"


라고 물어오셨다. 사실 5000원을 끊고 비양동으로만 가기에는 표 값이 조금 아까워 묻지 않고 그냥 버스를 탔었다. 왠지 물어보실 거 같았는데 막상 물어오시니 당황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기사 아저씨께 여쭤보았다.


"아... 당일에 끊은 표만 사용할 수 있나요?"


"네, 여긴 보통 코스로 돌고 관광객들이 제주로 돌아가니까요. 혹시 우도에 오늘 도착한 게 아니세요?"


"네... 사실 3일 전에 왔었는데, 지금 비양동에만 가는 거라 혹시나 하고 탔습니다. 죄송해요... 다시 새로 끊어오겠습니다."


"잠깐만요, 오늘은 그냥 타고 가세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숙소는 어디서 주무셨어요?"


"아... 아실지 모르겠는데 우영팟이라는 숙소에서 묵었습니다."


"거기 우리 사촌동생이 하는 곳인데?"


"네? 와... 가족 이셨구나. 안 그래도 여사장님이 지금 비양동에 게 잡고 계시다고 놀러 오라고 하셔서 가는 길이에요."


"하하, 그럼 당연히 태워줘야지. 데려다 드릴 테니까 걱정 말고 타고 있어요."


이 작은 우도라는 섬에서는 모든 이들이 사촌이고 가족인 걸까. 나이가 지긋하신 아저씨께선 호탕하게 웃으셨고, 나도 그 웃음소리에 웃음이 터져서는 한동안 함께 웃었다.

아저씨께서는 가는 도중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셨는데, 알고 보니 머뭄 카페도 아저씨의 사촌 손녀께서 운영하시는 곳이었다. 머뭄 카페 사장님도 우영팟 사장님들과 핏줄로 연결되어있는 사이였다. 친절함이 가족력이라도 되는 듯 다들 그렇게 좋은 분들이었다는게 단번에 이해가 되면서, 우도로 여행을 계획했던 과거의 내가 잠시 대견해졌다.


도착한 비양동 광장은 특이하게 생긴 곳이었다. 계단식으로 생긴 광장 입구에는 맑은 날인데도 파도가 높은 편이었고, 미끄럼 주의 표시 팻말과 함께 입구에는 굵은 체인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사장님 말씀으로는 이곳은 생각보다 물살이 세서 관광객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라 한다. 대신 깅이가 서식하기는 좋은 환경이라 이 곳에 깅이가 많이 살고 있다며 좋아하셨다.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가에는 그나마 놀기 괜찮은 모래사장이 따로 있어서 관광객들은 그곳에서 스노클링을 많이 한다며, 여기 파도가 높아서 무서우면 모래사장에 가서 하라고 알려주셨다. 깅이는 우도에 서식하는 토종 게인데 어디 가서 먹어볼 수 없다며, 나중에 잡아서 해물라면을 해줄 테니 잠시 스노클링을 하고 있으라고 하시곤 다시 깅이를 잡으러 가셨다.

나는 사장님께서 간식으로 먹으라고 주신 복숭아를 아삭아삭 베어먹으며 사장님과 친구분들을 잠시 지켜봤다. 여행 와서 입고 버리려고 들고 온 청반바지가 있었는데, 친구분께서 빌려달라고 하셔서 챙겨갔던 참이었다. 바지를 전해드리고는 원래 안 입는 바지라 드리겠다고 하니 너무 고마워하셔서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미놀타를 꺼내 들어 그곳의 풍경을 두 컷 정도 찍고는 바닥에 잠시 놔두었다.






그러다 자리를 옮기다가 미놀타를 약간 바닥에서 끌게 되었는데, 미놀타의 바디에 흠집이 생겨버려서 정말 마음이 아팠다.(여행에서 돌아가자마자 미놀타의 카메라 케이스를 뒤져서 구입해 여태까지 장착해두고 있는 이유이다. 미놀타의 바디는 플라스틱이라 약하므로 웬만하면 속사케이스가 있는 편이 마음이 놓일 것이다.)

비양동 광장에서 하는 스노클링은 나름 즐거웠다. 안 그래도 스노클링을 하려고 들고 갔던 스노클링 장비가 있는데, 서울에서 일부러 사들고 내려와 놓고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갈 뻔했다. 사장님께서는 또 어찌 아시고는 스노클링을 하러 오라고 하셨는지 모를 일이다. 푸른 바닷속은 투명했고, 파도가 칠 때마다 하얀 모래들이 회오리치며 감기는 모습이 전부 보였다. 작은 물고기 떼들을 구경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원한 우도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몸을 덥히다 못해 익히던 더위가 거짓말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입고 갔던 래시가드가 하필 검은색 래시가드여서, sns에 올린 사진을 본 친구들은 해녀로 취직했냐며 놀려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깅이 잡이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 사장님이 끓여주신 해물라면과, 두부김치, 그리고 우도 막걸리로 아주 기가 막힌 식사를 한 후 물놀이 마무리를 완벽하게 마쳤다.


이날 마무리는 역시 서쪽의 책방 밤수지맨드라미에 가는 것으로, 그리고 우도의 서쪽 노을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책방 옆 돌담 길 위의 고양이




그 날 저녁 우도에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섬의 날씨라는 것이 원래 시간대별로 다르다고는 하지만, 섬 속의 섬인 우도는 더더욱 그 변화가 극과 극이라고 한다. 그리고 파도가 높아지면 배가 다닐 수 없도록 갑작스럽게 풍랑 주의보가 떠서 섬에 발이 묶이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데, 난 사장님께 그 이야기를 듣고 다음 날 배가 뜨지 않기를 은근히 바랬다. 내일 아침 풍랑주의보로 우도에서의 하루를 더 선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장님께서는 걱정하셨지만, 오히려 날씨 핑계로 하루 더 우도에서 머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 다음 날 나는 첫 배를 타고 우도를 나설 수 있었고, 첫 배가 떠난 직후에 풍랑 주의보가 내리면서 배가 끊겼다고 한다. 우산 없이 나섰던 여행이라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릴 뻔했던 날, 바꾼 비행기 표가 전산 오류로 예약이 되어있지 않아서 잠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고맙게도 전산오류가 난 덕분에 비행기 맨 앞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계획했던 일들이 약간이라도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의 나였는데, 그때의 나로서는 나름 큰 마음먹기였던 여정의 변경도 그저 즐거웠던 추억으로 기억되었다. 고작 하루를 더 있을 수 있었던 것뿐인데, 그날의 공기도 풍경도 느낌도 모든 것들이 더 감사하고 새롭게 느껴졌었던 것을 보면 내 삶의 온도 대부분을 좌우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먹기가 아니었을까?

잊고 있던 감사하는 마음, 너무나도 간단한 삶을 대하는 방법, 그리고  이치를 떠난 여행길 위에서 찾는다. 그리고 희미해지는 그때의 풍경들을 미놀타와 함께 떠올린다. 그렇게 두 번 행복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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